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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큐레이션

『조선잡사』,
잡(job)의 역사로 선인(先人)들의
잡(雜)스러운 삶을 엿보다

불과 20대에 영조의 어진과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자의 초상화를 그리며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떨친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김홍도(金弘道, 1745~1806)다.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진 김홍도는 산수화나 인물화 및 초충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회화에 능했다. 화가일 뿐 아니라 거문고와 생황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음악가였으며 서예가와 시인으로서도 인정받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무동>이나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와 같이 당대 민중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생동감 있고 개성 넘치게 담아낸 풍속화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잡사』는 김홍도가 붓끝으로 그려낸, 우리보다 앞서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아가던 민중의 삶을 그네들의 밥벌이 수단이었던 직업으로 들여다본 일종의 풍속화이자 생업 민속을 간결하고도 담백한 문체로 풀어쓴 책이다.

김홍도 | 단원풍속도 | 첩무동(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 대장간(국립중앙박물관)

저자에 따르면 이 책에서 다룬 직업들은 총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선택되었다. 첫째는 조선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직업이다. 둘째는 현대 독자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직업이며, 셋째는 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운 직업으로 이 책은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총 예순일곱 개의 직업을 뽑아 업무의 내용과 종사자들의 특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화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총 7부로 구성된 『조선잡사』의 1부는 삯바느질을 하던 침모(針母), 혼인날 신부의 화장과 의상을 담당하던 수모(首母), 당대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화장품을 판매하던 매분구(賣粉嫗)를 비롯하여 당대 여성들이 종사하던 일곱 개의 직업을 다루었다.

관청의 여종이나 기생에게 바느질을 시키면 안 된다. 부득이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면 침비(針婢)를 부르거나 침가(針家)에 가져가서 삯을 주고 맡겨라.
-정약용, 『목민심서』

사진엽서 조선풍속(朝鮮風俗) 바느질(부산광역시립박물관)

이 가운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인용하며 시작된 침모 혹은 침비(針婢)라 불리며 삯바느질을 업으로 삼던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침비의 유래와 함께 당대 여성의 기본 소양으로 인식되었던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여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모친이 새벽닭이 울도록 삯바느질을 했다는 이야기는 박제가의 사회적 성취 뒤에 어두운 등불에 의지하여 한 땀 한 땀 쉬지 않고 바느질했던 모친의 헌신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손가락이 붙어 있는 장애를 지닌 여성이 발가락으로 수를 놓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산다는 것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2부에서는 흔히 ‘망나니’라 불리던 사형 집행자인 회자수(劊子手)와 나라에 공물로 바칠 뱀을 잡던 땅꾼을 비롯한 열세 가지의 극한직업을 소개하고 있으며, 3부는 조선판 프로 바둑 기사인 기객(棋客)과 글로 된 소설을 생동감 있는 목소리로 재현한 전기수(傳奇叟)와 같이 예술의 세계와 관련된 총 아홉 개의 직업을 다루었다. 이 가운데 이 책에 실린 전기수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종로 담배 가게에서 소설 듣던 사람이 영웅이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로 소설책 읽어주는 사람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정조실록』14년(1790) 8월 10일

18세기는 소설 문학이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로 비싼 책값과 높은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궁궐에서부터 촌구석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소설 향유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읽는 소설에서 듣고 보는 소설로의 전환을 도모한 새로운 직업인들을 배출하였으니 그들이 바로 전기수다. 소설책을 읽어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전기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저잣거리나 담뱃가게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김홍도 | 단원풍속도첩 | 담배썰기(국립중앙박물관)

그러고는 등장인물과 작품의 내용에 따라 목소리와 억양을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마치 일인극의 주인공처럼 책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였으니 오죽하면 청중 가운데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겠는가?

4부에서는 조화(造花)를 만드는 화장(花匠)을 비롯하여 거울을 만드는 마경장(磨鏡匠)이나 붓을 제작하는 필공(筆工) 등 조선의 여러 기술자를 다루었고, 5부는 우리가 잘 아는 흥부도 종사한 바 있는 죄인의 곤장을 대신 맞아주고 돈을 받던 매품팔이나 과거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주던 거벽(巨擘)과 같이 불법과 합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돈벌이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6부는 당대 국가 회계사의 역할을 하던 산원(算員)이나 살인사건 발생 시 변사체의 검시를 담당하던 오작인(仵作人) 등 당대의 전문직들을 소개했으며, 7부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집주름이나 책 거간꾼으로 활동했던 책쾌와 같이 다양한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이 땅에서 살았던 선인(先人)들이 어떠한 일들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러한 직업이 등장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다양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하여 종합적으로 담아냈다. 그러한 까닭에 당대 민중의 삶을 사실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고전 서사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생존은 시대를 초월하여 늘 절박하고 그래서 모든 민중의 삶은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에 앞서 대체로 위대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분주한 출근길의 지하철이나 식곤증이 몰려오는 오후, 간결한 문체로 작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조선인들의 삶을 다양한 직업으로 들여다본 『조선잡사』 일독을 강력히 추천한다.


글 | 주수민_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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