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
나름대로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지도 모르는 습관이 있다. 바로 어느 박물관에 가더라도 상설전시관을 먼저 방문하게 된다는 것. 그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면서 찬찬히 보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상설전시관은 박물관 고유의 정체성이 담기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정 주제로 이야기하는 기획전시보다도 포괄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료나 콘텐츠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더욱이 유물과 매체의 조화로운 균형이 중요한 것 같다.

최근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 국립해양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을 방문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국내에서 가장 최근에 열린 전시관인 만큼 영상매체의 사용이 깔끔하고 세련됐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관을 둘러보면 곳곳에서 재밌는 관람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무조건 양이 많거나 화려한 것보다도 있어야 할 곳에서 자기 역할을 잘하는 콘텐츠들을 보면서 디자이너의 오랜 고찰과 관람객을 향한 깊은 배려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셀 수 없는 과거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데이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2023년 6월 개관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국내 국립박물관 중에서도 최근 개관한 곳으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문자를 다루는 문자 전문 박물관이다. 유물을 단순히 나열해 보여주는 것이 아닌 문자 자체가 가진 극한의 아름다움을 소개한다는 목표만큼 다양한 전시기법과 매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많은 콘텐츠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관람 포인트는 재밌게도 전시관 내에서 가장 작은 면과 가장 큰 면으로 이뤄진 두 종류의 디스플레이로 각각 과거와 미래의 데이터를 다루고 있었다.

가장 작지만, 가장 오랜 시간 관람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곳은 다름 아닌 디지털 레이블로 활용되는 디스플레이 앞이었다. ‘문자의 탄생과 변천사에 관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연도별로 정리된 유물 목록과 자료들은 단순히 일차원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연구자 노트>라는 선택지를 통해 고대 문자의 발전 과정을 함께 보여주며,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불어 원하는 부분을 해독해서 볼 수 있는 번역본은 유물을 더 다채롭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반면 가장 크게 활용되는 면은 바로 가상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체험 콘텐츠로 사용된다. 상설전시관의 마지막 존에 해당하는 <문자로 그리는 미래>에서는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한 미래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의 영역이 어떤 범주로 확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글보다는 영상, 문자보다는 이모티콘 그림에 익숙해져가는 시대에서 문자의 미래는 AI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인터랙티브로 표현되는 코딩 값을 보면 그림 뒤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문자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공간재현을 통한 인식의 경험, 국립해양박물관
국립해양박물관은 2012년 개관 이후 10주년을 맞이해 2023년 9월 두 개의 상설전시관을 새로 단장했다. 새로운 공간과 콘텐츠로 볼거리가 가득했던 국립해양박물관의 관람 포인트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는 전혀 달랐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역사와 정보를 중심으로 데이터를 전달하는 매체 사용에 초점을 맞췄다면, 국립해양박물관은 해양^海洋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넓고 깊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듯한 공간 재현에 강점이 있었다. 선명한 스토리를 읽고 넘어가는 것보다도 시각적인 포인트가 아주 많았는데, 마찬가지로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 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관을 빠져나오면서 가장 크게 감탄했던 첫 번째 관람 포인트는 하나의 전시관에 배치된 영상이 곳곳에서 같은 패턴감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

일반적으로 관람객들은 스토리가 명확한 영상이 아닌, 유물과 같은 오브제 뒤로 배치되는 배경에서는 큰 임팩트를 느끼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배경영상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 관람객의 무의식 속에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여가는 영상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식의 변화는 실로 놀랍다. 국립해양박물관의 4층 항해관을 둘러보면 전시관 전체를 통과하면서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과연 이러한 몰입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전시장 곳곳에서는 도입부 영상으로 사용된 물결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오브제를 수식하며 바다의 물결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글자가 되었다가 도형으로 흩어지기도 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전시관을 빠져나오기까지 이 패턴을 보는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프롤로그 존에서 낱개의 선이 지구의 거대한 바다를 이뤘던 장면을 생각하게 된다. 이 포인트를 알고 다시 전시관을 처음부터 훑어본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파도가 자연스레 물결칠 것이다.

최근 영상 기술이 발전하면서 VR, AR을 넘어 이제는 XR 기술까지 전시 영역에서 활용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관람 포인트는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상시로 운영하는 미디어 전시실이다. <시대를 항해하다>는 한국해양진흥공사와 협업하며 만든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국내 유일 해양산업 특화 미디어아트 콘텐츠다. 총 3개의 섹션과 4종의 인터렉티브 체험물로 구성된 실감 영상 콘텐츠는 360도의 전면과 바닥 면을 활용하여 마치 바닷속에서 숨 쉬는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실제로 XR 스튜디오의 운영은 콘텐츠 개발에 있어 비용 소모가 크고 전문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업 시설에서도 상시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국내 박물관에서 실감 영상과 미디어 전시관이 이렇게나 활성화된다는 것은 실로 감탄스럽고 관람객 입장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

좋은 영상의 기준,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고 할지 몰라도 나는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감수성과 메시지를 좋아했다. 감명 깊은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영상학과로 진로를 정했던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 작가가 아닌 디자이너가 되었다. 글을 잘 쓰면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 분야를 경험할수록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에 갇혀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영상은 상상 이상으로 복합적인 매체라는 걸 알게 됐는데, 내 생각을 바꾼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현시대의 메시지는 글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박물관을 둘러보며 공통으로 느꼈던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 사용된 매체들이 조화롭게 유물과 자료를 수식한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기반으로 했던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문자라는 콘텐츠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텍스트와 정보 전달 중심의 매체를 사용했다. 국립해양박물관은 공간의 이미지에 기반한 매체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주력 콘텐츠인 바다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두 박물관이 집중하던 포인트는 전혀 달랐지만, 각자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전에 글로써 읽어내야 했던 메시지는 이제 이미지로 보이기도 하고,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유에서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어떤 것에 집중했는지, 그 형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종이에 적는 글로 머물지 않고 입체적인 메시지를 만들어 가는 것, 유물의 이야기를 전달할 방법을 극대화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두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함께 공유하며 각자의 사유를 통한 메시지를 가슴에 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안은혜_전시운영과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