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기획하다가 생기는 자료의 빈칸은 의외로 가장 사소한 것일 때가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닌 보통날의 기록,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인 물건 등.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 남겨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열심히 수소문해 적합한 자료의 소장자를 찾는다 해도 ‘아니, 창피하게 뭐 이런 걸 빌려 달라고 해요.’ 하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 거창한 것들이나 모여있을 법한 박물관에서 모셔가기엔 너무 시시한 자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사사로울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을 전시 중인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특별전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를 소개하며, 개인의 기록과 수집이 가진 특별함을 새삼 발견한다.
개인의 활동을 기록하는 문서 ‘이력서cv’
‘이력서’란 한 사람이 거쳐온 학력·경력 등을 적은 서류로, 그동안 쌓아온 개인의 활동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이력서란 작품 활동과 전시 이력일 것이다.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는 사물과 정보를 조사-수집-분석하는 방법론을 발전시켜 온 박미나와 Sasa[44]의 2인전으로, 두 작가의 전시 이력 자체를 하나의 전시로 풀어냈다. 전시 구성 또한 이력서의 양식에 따라 ‘전시 이력’과 ‘참고문헌’으로 나누었다. 전시실1 ‘전시 이력’에서는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주요 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과 함께 두 작가의 협업 작을 포함한 미발표작 140여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2 ‘참고문헌’은 2001년부터 2022년까지 박미나와 Sasa[44]가 언급된 1,259개의 기사를 모두 수집하여 한 권의 책과 사운드 작업으로 재구성하였다.
전시장을 채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저히 개인의 관심사가 반영된 수집품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 가득하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되는 그림, 매달 수집한 한정판 운동화, 작가의 생활 패턴과 식습관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보아서는 작품이 가진 뜻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면 작가의 의도에 공감할 수 있다. 자료는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별걸 다 모으는
일정 기간, 특정 장소에서 내가 마신 음료수의 개수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Sasa[44]는 알고 있다. 2004년 7월 15일에서 9월 25일까지 호주 IMA스튜디오1에서 Sasa[44]가 마신 음료수는 총 192병(관객이 놓고 간 맥주병 2개를 포함한다). 위스키, 우유, 에너지 음료, 요구르트, 물, 주스, 콜라까지 각각 몇 병씩 마셨는지, 상품명과 용량까지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 심지어 빈 병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작품명 <2004년 7월 15일에서 9월 25일까지 호주 IMA스튜디오1에서 Sasa[44]가 마신 음료수들>은 호주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작가가 출품작의 ‘생산’에 관해 고민하던 중, 적어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비’를 한 증거는 내놓을 수 있겠다며 제시한 작품이다. Sasa[44]는 편집증적으로 물건을 모아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문화를 통찰적으로 엮어내는 아카이브 기반의 작가이다. 이렇게 모인 빈 병들도 시간이 흐른 후엔 상품의 디자인 변화, 소비의 흐름 등을 파악하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2019년 국립민속박물관은 껌 190여 점을 기증받았다. 기증자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의 껌을 낱개로 포장하여 보관하였고, 껌 포장지의 디자인은 당시의 시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자료이다. 껌이 녹아 눌어붙어 훼손된 껌 포장지들을 현대 민속자료로 보존·관리하기 위하여 오염되고 손상된 부분을 보존처리하였고, 2020년 ≪7080 추억의 껌-껌 포장지 보존처리≫라는 전시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얼핏 보기엔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할 만큼 거창해 보이지 않는 자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료의 특별함을 알아봐 줄 시선과 그에 알맞은 기획력이 있다면, 개인이 굳이 모아둔 물건은 한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별걸 다 적어놓은
작가의 이름이 왜 Sasa[44]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사사로운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사롭다’의 ‘사사’가 아닌가 하는 장난스러운 추측을 하게 된다. Sasa[44]는 2015년 1월 16일부터 건강 회복을 위해 술을 끊고 매일의 식단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매년 365일 치의 정보를 책, 포스터, 리플릿 등의 형식으로 발표하는 <갱생> 연작은 작가가 하루 동안 섭취한 식단과 식사 시간, 주기적으로 측정한 몸무게 등을 통해 생활 패턴과 연동된 건강의 추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의 자전적인 소비를 집요하게 기록하여 데이터화하는 방식은 <연차 보고서> 연작과도 같다. 설렁탕 소비량, 자장면 소비량, 교통카드 사용량, 영화 관람 횟수, 도서 구매량, 휴대전화 통화량, 용무를 보기 위해 기다린 시간, 출퇴근 기록의 8가지 지표를 통해 한 해를 기록하고 매년 다른 형식으로 보고서를 발표한다.
<갱생> 연작과 <연차 보고서> 연작은 작가가 사 먹은 음식의 목록, 구매한 물건 등을 통해 소비사회, 데이터 사회의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또한 작가의 소비에 영향을 준 변수들을 통해 주변 상황의 변화를 알 수 있는데, 은행의 대기 접수 번호표가 발부되어 대기 시간이 줄었다든지 서점의 분점이 생겨 책 소비량이 줄었다든지의 내용이다.
Sasa[44]에 지지 않는 기록 광의 자료로, 국립민속박물관은 1997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된 ‘박래욱 일기’를 소장하고 있다. 1950년부터 2005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일기는 모두 98권이며, 2만여 쪽, 1천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일기야말로 개인의 하루를 남긴 사사로운 기록이지만 50년이 넘는 세월이 담긴 박래욱 일기는 시절의 풍경을 재현하는 기초 자료이자 시대의 증거가 된다. 즉 개인의 기록은 시대의 기록이 되고 역사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아카이브의 선물
아카이브는 단순 작업,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작업으로 시작된다.1) 다량의 수작업으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과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렇게 확보한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살피다 보면 뜻밖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아카이브의 선물’을 발견하기 위한 박물관의 역할이 아닐까.
박물관이란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덕을 보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혹시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아카이브였다 하더라도, 전시 기획자의 미싱 링크(missing link)2)를 해결해 주시는 ‘별걸 다 적어놓고’, ‘뭐 이런 걸 안 버린’분들에게 감사드린다.
1)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아카이브 취향』, 2020, 문학과지성사.
2) 빠진(잃어버린) 고리로, 전체를 이해하거나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
<참고자료>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홈페이지 https://semaaa.seoul.go.kr/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특별전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 도슨트 프로그램
2018 일민미술관 Sasa[44] 개인전 ≪엉망≫ 전시 도록
글 | 김은혜_전시운영과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