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판이나 나무판 또는 탁자 위에서 말이나 카드를 이용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두 명 이상이 둘러앉아 즐기는 놀이를 통틀어 보드게임Board Game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보드게임도 여럿 있는데 윷놀이처럼 연원이 오래된 보드게임에서부터 뱀주사위놀이, 부루마블 등 현대에 생겨난 보드게임까지 다양하다. 과거 1970~80년대 풍의 문구점이 거의 사라져 이제는 문구점 한구석을 가득 메웠던 보드게임 상자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2000년대 초까지는 보드게임방이 성행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바둑, 장기, 쌍륙, 윷놀이 등 보드게임이 성행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전통적인 놀이라 하여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이 전통적인 보드게임들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보드게임에 관한 대개의 기록이 주로 이 놀이의 문제점과 병폐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순한 보드게임이 사회적 병폐를 가져오게 된 데는 놀이 방식에 포함된 특별한 요소 때문이다.
대개의 보드게임은 ‘운’과 ‘전략’ 두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구성된다. 주사위나 윤목輪木, 무작위 카드 등이 ‘운’의 요소라면 이 ‘운’을 바탕으로 말을 놓거나 선택하는 과정은 ‘전략’에 해당한다. ‘운’보다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승패가 판가름 나는 놀이는 대개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기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둑, 장기, 쌍륙 등이다. 이렇게 전략성이 강한 놀이들은 바로 내기로 이어져 노름으로 바뀌기 쉽다. 그런데 놀이와 노름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거니와 노름의 기반이 놀이다 보니 놀이를 곧 사회적 병폐로 인식하기도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로 유명한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조부인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자신의 저술에 당시 유행하던 보드게임으로 장기, 바둑, 쌍륙, 골패, 윷놀이 등을 꼽았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놀이는 정신을 소모하고 뜻을 어지럽히며 공부를 해치고 품행을 망치며 경쟁을 조장하고 사기를 기른다. 심지어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형벌까지도 받게 된다. 그러니 부형된 자는 엄금하여 놀이도구를 혹 숨겨두는 일이 있으면 불태우거나 부숴버리고 매를 때려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조선시대 『태종실록』에는 노름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기록하고 있는데, 노름하다가 체포된 자들에게 최대 장杖 100대를 치고 판돈을 몰수하는 중형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노름이 사회에서 얼마나 유행하였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폐해를 끼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노동이나 생업, 곧 일과 생존에 관계없는 모든 자발적 행위를 말한다. 프로게이머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현재와 다르게 조선시대의 보드게임은 그야말로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노름의 수단 정도로 인식되어 사실상 경제적·사회적 가치와 무관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게 놀이가 목적인 보드게임 중에서도 당시 조선시대의 사회적 가치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보드게임들이 생겨났는데 ‘승경도陞卿圖’, ‘규문수지여행지도閨門須知女行之圖’와 같은 놀이가 바로 그러하다.
조선시대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승경도’를 만든 이는 하륜河崙, 1347~1416이라고 전한다. ‘승경도’는 과거에 나아가 관리가 될 수 있는 양반가 자제들을 위한 보드게임으로 최고의 관직까지 제일 먼저 도달한 이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놀이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관직 체계와 이에 따른 권한 체계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짜여 있는 게 특징이다. 윤목輪木이나 주사위 또는 윷 따위를 던져 나오는 수에 따라 칸을 이동하는데 해당하는 칸에 명기된 관직에 따라 권한이 달라진다. 때로는 하급 관리를 파직罷職시킬 수도 있고 때로는 사약을 받을 수도 있으니 조선시대 관직 사회를 모의로 경험해보는 셈이다.
‘승경도’가 양반가 남자아이들과 이미 관직에 나아간 관리들에게 인기 있는 보드게임이었다면 ‘규문수지여행지도’는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을 위한 보드게임이었다. 당시 사회가 부녀자들에게 요구했던 기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놀이 내용을 통해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규문수지여행지도’는 놀이판에 적혀있듯이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친정의 여아들을 위해 제작하였다고 전하며 승경도와 마찬가지로 수에 따라 칸을 이동하여 가장 높은 단계에 먼저 도달한 이가 승리하는 놀이다. 놀이판은 사각형의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칸에는 악녀惡女나 짐승에서부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妊에 이르기까지 모두 119개로 구성된다. 여아들을 위한 놀이였기 때문에 승경도와 달리 한글 명칭과 설명이 병기된 점이 특징이다.
‘승경도’나 ‘규문수지여행지도’는 주사위나 윤목의 수에 따라 칸을 이동하는 공통적인 놀이 방식을 갖고 있다. 현대에도 이런 종류의 보드게임이 여럿 있는 것을 보면 그 유래가 짧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그 내용만 바뀔 뿐 놀이 자체는 사실 동일하다. 불가佛家에서 행했던 성불도成佛圖를 기본으로 하여 승경도를 제작하였다는 얘기나 중국 당대唐代의 투자선격骰子選格을 기초로 하였다는 얘기, 인현왕후가 규문수지여행지도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냈다는 얘기 등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시대적 상황과 목적에 따라 보드게임 내용을 변화시켜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회적 가치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요즘에는 인기가 줄어들어 다양한 종류의 보드게임을 접하기 어렵지만 2000년대 초 문구점에는 크기와 종류가 다르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수백 종의 보드게임을 판매했다. 그러나 놀이 형식은 ‘승경도’나 ‘규문수지여행지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면서 고관대작과 현모양처가 최고이던 것이 간첩과 도둑을 잡는 것으로, 건물을 지어 부자가 되는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예쁜 유명 캐릭터와 함께 노는 것으로 변화된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는 요즘 산리오 시나모롤Sanrio Sinamoroll 보드게임에 푹 빠져 산다. 옛것과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 보드게임이지만 시나모롤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매우 특별한 보드게임이 되었다. 헬로키티Hello Kitty, 포차코Pochacco 등의 말판 캐릭터에 본인을 이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또한 시대가 바뀌면 또 다른 무엇인가로 변할 테지만 그렇게 바뀐 새로운 시대의 가치는 이제 무엇이 될지, 미래의 보드게임에는 어떤 캐릭터와 가치가 등장할지 부쩍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글 | 위철_전시운영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