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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폭염 속에서 만나는 정갈한 순간
강원도 인제군 여초서예관

너무나 따가운 햇살은 사람들을 그늘진 곳으로 내몬다. 더위가 절정을 이루는 8월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다만 떠나는 이들 중엔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디가 목적에 부합하는 곳인지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은 그런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목적지가 되어준다.

전설 속 동물이 살고 있던 곳
인제라는 이름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만 그 뜻을 풀어보면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기린 린에 발굽 제, 즉 상서로운 전설 속 동물 기린의 발굽을 닮은 고장이라는 뜻. 또 어떤 이는 영험한 기운을 가진 사슴이 기린이 된다는 설화가 있는데, 인제군은 예전부터 많은 사슴이 사는 곳이었던 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제군의 역사는, 그 이름의 유래를 추측하는 일만큼 환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질 당시 현재 인제군의 북쪽은 북한으로 편입됐다. 다행히 한국 전쟁 이후 그 대부분이 복군 되기는 했지만,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지금도 인제군에는 동부전선 최대 거점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다. 인제군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그렇다 해서 인제군이 온통 엄중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은 아니다. 서울에서 약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 데다 깊은 숲과 그 사이를 흐르는 내린천 덕분에 다양한 야외활동을 즐기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레저 스포츠의 명소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 게다가 계절마다 빙어 축제, 황태 축제 등이 열리고 있어 강원도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차분한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워낙 많은 산을 거느리고 있는 곳이기에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준비돼 있는데, 특히 고원에서만 자라는 야생화 군락이 가득한 곰배령과 순백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숲의 인기가 높다. 만해 한용운이 출가한 백담사 역시 고요한 여름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만약 그 어느 곳보다 서늘한 8월을 경험하고 싶다면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다.

여초서예관

묵향墨香 가득한 여름으로의 초대
인제군에서 고성과 속초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여초서예관은 “추사 이후 여초”라는 짧은 문장으로 그 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김응현 선생의 생애와 작품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공간. 설악산과 진부령으로부터 흘러내린 북천 옆에 있는 여초서예관 입구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단정하게 지어진 회색 건물이다. 곱게 정돈된 길을 따라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검게 빛나는 물 위에 석각되어 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명사였던 청음 김상헌의 <서간초당우음>을 여초 선생이 작품으로 남긴 것. 그제야 건물의 구조가 이해된다. 깨끗한 벼루에 이제 막 곱게 갈아낸 먹물로 너른 벽을 여초 선생의 글씨로 채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어쩐지 머리가 시원해진다. 2012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이력 역시 자연스레 납득된다. 내부로 들어서면 청량감은 극대화된다. 나무와 유리로 구성된 구조물은 서늘하면서도 안락한 느낌을 주는데, 길게 뻗은 경사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여초 선생의 작품과 마주하게 되면 이러한 공간구성이 작품들을 감상하는 데에 더없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감상할 작품들은 이외에도 상당하다. 종이뿐 아니라 도자기를 수놓은 작품들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터치 스크린을 이용해 직접 서예를 체험해볼 수도 있다. 덕분에 여초서예관에서의 8월은 그 어느 곳보다 조용하고 서늘할 수밖에 없다. 묵향이 돼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여초 선생의 예술혼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초서예관에서의 시간은, 먹물이 종이에 스미듯 천천히, 하지만 깊게 흐른다.

깊은 산에서 만나는 각기 다른 즐거움

백담사
강원도에는 다양한 사찰이 존재하지만, 인제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백담사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출가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찰은,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백담사와 멀지 않은 곳에 만해문학관이 건립된 것도 그런 까닭. 물론 문학적 의미로만 가득 찬 공간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절경도 몹시 아름다워 방문객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여름이면 맑고 차가운 계곡물에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백담계곡이 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다만, 계곡 가까이까지는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기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유료 셔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사진 제공: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
인제군이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데에는 원대리에 조성된 자작나무숲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원래 자작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남방한계선은 금강산보다 조금 더 북쪽. 즉, 자연 상태로라면 인제군에서는 자작나무가 자생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는 원대리도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곳이었지만, 솔잎혹파리 피해로 인해 일대의 소나무를 모두 베어낸 후 그곳에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138ha에 식재한 자작나무들은 약 69만 그루. 휴전선 이남에서 이만큼의 자작나무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원대리가 유일하다. 그래서 약 1시간 동안 쉼 없이 오르막길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 않고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자작나무숲을 찾는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인도를 걷는 것과 다름없는 풍경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펼쳐지는 그 생경한 풍경은 모든 고단함과 피로에 대한 보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내린천
래프팅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 이들에게 내린천은 말 그대로 성지聖地와 다름 없는 위상을 갖고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데다 수량이 풍부해 여름이 가까워지면 주말마다 많은 이들이 인제군을 북적이게 만든다. 물론 단순히 수도권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요건만으로 내린천이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양양에서 발원해 소양강에 합류하는 약 40km 구간 곳곳이 래프팅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코스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인데, 래프팅뿐 아니라 낚시터, 유원지, 쉼터 등 다양한 목적에 부합하는 공간들도 촘촘하게 구성돼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근래에는 1인 래프팅인 리버버깅과 카약, 와이어에 매달려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짚트랙과 번지점프 등을 위한 시설도 준비돼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
근대 이전, 강원도에서의 생활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강원도 만큼 산과 나무, 골짜기가 많은 곳이 없었기 때문. 그래서 강원도는 그 자체로도 민속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인제 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은, 이제는 사라진 강원도의 산촌 생활이 어떠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곳. 특히 각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농사들과 그 농사에 사용된 농기구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들과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관람 내내 흥미를 끈다. 특히 야생벌의 꿀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토봉이나 한반도 최고의 산삼 산지인 인제의 심마니들의 도구들은 오직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전시품들.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 협력망으로 등록한 뒤에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미니인터뷰

여초서예관, 즐거운 마음으로 방문하면 좋은 곳이랍니다
-이혜정(여초서예관 학예연구사)

서예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한 예술이라 생각하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서예는 여전히 친숙하고 꼭 필요한 예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독특하고 멋진 글자들, 흔히 캘리그라피라 부르는 분야 역시 서예의 한 줄기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 여초서예관에서는 서예가 결코 낯설거나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서예 교실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이고요. 물론 서예와 여초 선생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서예는 단순히 글을 아름답게 쓰는 행위가 아니라, 글자 안에 서예가의 정신세계를 담는 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은 여초 선생님의 인품을 직접 느끼길 원하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질 뻔했던 우리의 전통 서법을 연구하는 데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중국 등지에 대한민국 서예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2006년 광화문 현판 교체론이 대두될 당시, 누구에게 글을 부탁할지 논의하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그 이름이 거명된 분도 바로 여초 선생님이었고요. 아쉽게도 건강상의 이유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요. 이런 여초 선생님의 생애와 작품들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기획을 준비 중인데, 그 과정에서 국립민속박물관과 협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 중입니다. 인제군의 대표 박물관 중 하나인 산촌민속박물관 개관 당시에도 국립민속박물관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앞으로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기획으로 많은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글 | 정환정_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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