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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걸어갈 길

글로벌 시대,
가장 한국적인 문화가
세계와 통한다

민속학은 배영동 교수의 삶을 이루는 근간이다. 대학생 때부터 남다른 연구로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그는 머리 희끗한 지금도 여전히 민속학계에 왕성한 연구와 활동으로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를 만나 민속학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민속학, 시대의 변화에 희망을 줘야 한다
배영동 교수는 바쁘다. 안동대학교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 외에도 비교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 (사)한국박물관회 부회장 등 그를 부르고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이 같은 상황은 배영동 교수의 이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대학 졸업 때 「금줄의 민속적 의미와 기능」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금줄을 치는 상황에 대한 사례를 수집해보니,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졌어요. 하나는 어떤 상황이 발생되기 전에 치는 것. 예를 들면 동제당제, 기우제 같은 제의를 행할 때 치는 금줄이 여기에 해당되죠. 그리고 또 하나는 상황이 발생하고 난 뒤에 치는 거예요. 아기가 나면 금줄을 치듯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차이였고 결국 제가 발견한 것은 전자는 세속적인 것을 정화하고 신성성을 고조시켜 우리의 염원을 신에게 전달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신성성을 누그러뜨려 세속적 질서에 편입되고 안착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으로는 똑같이 금줄이지만 기능상으로는 정반대의 의미였던 거죠. 그래서 금줄은 한국문화에서 성sacred과 속profane의 변환장치라는 것이었죠.”

특유의 집요함과 성실성으로 민속학 전공 학생에서 학예연구사로, 대학박물관 관장으로, 문화재위원으로 또 교수로서 그 활동영역을 꾸준히 넓혀온 배영동 교수는 그 쌓인 세월 속에서 민속학과, 민속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민속학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몫을 하고 있다.

“안동대 민속학과 이름이 올해부터 문화유산학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사회가 변했다는 소리예요. 지금은 세대와 세대 간에 굉장한 격차가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세대와 40~50대는 민속을 친숙하게 생각하지만 매일 스마트폰, 유튜브를 보며 세계 정보망과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중·고생들은 다릅니다. 교육이라는 건 시대가 변해도 희망을 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해요. 학생들이 급감하는 상황이 더 큰 변수죠. 민속학은 고전적이고 순수학문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덜 고전적이면서 실용성이 있고 이 시대 중·고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이 무엇일까? 학과 이름을 바꾸기까지 많은 분들이 고민을 했던 이유이지요.”

배영동 교수는 문화유산학과로 이름을 바꾼 뒤 올해 처음 맞는 신입생들의 숫자가 늘어났다며 향후 민속학과 문화유산학의 접점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찾고 커리큘럼에 반영하면서 문화정책과 관련된 과목을 만드는 등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을 고민하는 것이 민속학 교육자들의 책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학원 석·박사과정에는 민속학과가 그대로 유지되고, 매우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민속학은 대학원 중심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칭찬하고픈 민속대백과사전 편찬과 전시회들
당연한 말이지만 민속학을 공부하고 연구해 온 배영동 교수와 국립민속박물관과의 인연은 깊고도 질기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88년 때 일이다.

“제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1987년 12월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박물관에서 ‘한국의 관모’를 주제로 특별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1988년 여름에 국립민속박물관에 좋은 모자가 하나 있어서 빌리려고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출장을 갔었어요. 지금의 김종대 관장님이 학예사로 있었던 때였죠.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온양민속박물관이 유물을 빌려 갈 준비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져도,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빠져도 유물은 안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포장을 도와주셨어요. 그때 유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더 깊은 깨달음을 얻었지요(웃음).”

국립민속박물관이 전시실을 바꿀 때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것도 배영동 교수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다.

“2전시실을 한국인의 1년, 세시풍속이 중심이 된 곳으로 만들 때였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음력 1월부터 3개월씩 잘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하다 보니 양력 2월이 봄으로, 양력 8월이 가을로 분류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때 저는 한국인의 계절 인식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결국 정월을 ‘연초의 세시’로 규정하여 독립시키고 그 나머지 달을 한국인의 계절인식과 맞춰 계절을 구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영동 교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잘한 일이 무척 많지만, 그중에서 잘한 일로는 ‘민속대백과사전’ 편찬 사업을 꼽았다. 전국의 민속학, 역사학, 복식사, 식품사, 주거사, 농업사, 상공업사 등 생활영역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전문가들에게 요청해서 원고를 받고 민속박물관에서 검수한 뒤 교정·교열을 거쳐 책을 내는 이 일련의 작업들이 더없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향후 밀레니얼세대, 제트세대까지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버전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생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온화한 배영동 교수의 얼굴이 좀 더 밝아진다. 이외 인상 깊었던 전시 목록도 줄줄이 나온다. ‘조기, 명태, 멸치 전시’, 줄여서 《조명치 전시》 같은 경우는 3가지 수산물을 함께 묶어서 다룬 점, 특히 한국인의 문화적 맥락을 따라서 밥상 위의 조명치, 뭍으로 오른 조명치, 조명치의 바다, 이렇게 3개 영역으로 나누어 전시 효과를 높인 것을 크게 칭찬했다.

“이 전시는 조명치를 매개로 하여 한국인의 식문화, 어민의 생계, 어류와 바다환경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고 봅니다. 또 《세계의 소금 특별전》 도 기억에 남아요. 동물계에서 사람만이 소금을 만들어서 먹는데 비교문화론적으로 보면, 처한 환경에 따라 소금의 종류, 생산방식, 의미와 상징도 다양하죠. 박물관 학예사들이 지구촌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조사하여 보고서도 내고 전시한 점이 놀라웠었죠. 인류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전시라고 생각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그 기능과 역할을 기대하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그간 과거에 전승되다가 지금은 없어진 많은 것들, 근대에 이르러 생겨난 수많은 것들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많이 발간했다. 이제는 보고서를 활용하여 그 역사·사회·문화적 의의를 분석하는 연구서와 대중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대중용 책자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시대의 민속에 대해서든 한국 문화 정체성의 지속과 변화라는 논리를 설명할 수 있을 때 민속박물관이 자신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영동 교수에게 세종시 이전을 앞에 두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져봤다. 망설임 없는 답변이 돌아온다. 분원 형태로라도 서울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저는 앞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첫째는 지역민속, 지역특색이 있는 전통적인 민속이죠. 두 번째는 현대민속, 여기에는 도시민속과 산업민속이 포함되지요. 세 번째로는 해외동포 민속, 민족의 정체성은 한민족이 사는 어느 곳에서도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죠. 네 번째는 세계화 흐름에 따라 형성된 다문화 사회 민속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런 민속을 조사하고, 자료수집·연구·전시·교육하면, 중차대한 제 기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리고 미래세대와 함께하는 연구기관, 사회교육기관, 한국문화 홍보기관으로서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상을 우뚝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배영동 교수는 우리는 ‘세계화’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강대국 문화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한국다운 문화는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답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미 세계화된 것을 또 보고 싶어하지는 않아요. 결국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는 한국다운, 우리다운 문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그렇게 해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활성화되는 거예요. 글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가 합쳐진 말이죠.
여기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민속학, 민속박물관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세계화 속에서도 우리 민족다운 문화를 생각하고 어느 정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해요.”

우리 민속학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갖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함으로써 후속 세대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배영동 교수. 그에게 민속학이란 ‘세상을 보는 가장 커다란 창’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글 | 배영동 안동대학교 문화유산학과 교수
인터뷰·정리 | 이경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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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김맹환 댓글:

    아름답다
    배영동교수 그가 걸어온
    학문의 여정을 보며 떠올린 한 마디다

    그에게서
    민속학의 희망을 본다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자쾌의 삶을 본다

    치열한 연구로 길어올린 100여편의 논문을 쓰고
    온 마음으로 후학을 가르치는 그의 교육현장

    오직,
    민속학의 길을 걸어가는 그를 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
    학문하는 기쁨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밤바다가 아니어도
    등대가 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길에서 등대가 되어
    무심히 불밝히는 사람이 있다

    그를 바라보며
    눈매 선한 그대 모습에서
    문득,등대를 떠올렸다

    그대 삶에
    그대 학문의 길에
    응원과 축복과 존경을 실어보낸다

    태풍 지나간 팔월의 자리
    백일홍 환히 피어
    여백의 뜰을 밝히고 있다

    김맹환미술관
    여백의 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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