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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낡은 물건 따위가 보여주는
낡지 않은 느낌

구식과 낡음의 매력
자료를 찾고자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간혹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수준 높은 정보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사용하는 카세트테이프 데크의 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여 검색해 보았는데, 한 카세트테이프 관련 동호회 게시판에서 발견한 예상치 않은 전문적인 내용에 내심 놀라웠던 경험이 있다. 더이상 생산되지도 않는 구식 물건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관심에 대해 궁금증까지 피어오를 정도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사람이 올린 글을 살펴보다 보니 ‘카세트테이프’와 그것을 재생하는 ‘플레이어’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소회가 매우 다양함을 알겠다. 자신의 옛 추억과의 조우, 부모의 것을 물려받아 더해진 각별함, 생소한 오래된 물건에 대한 호기심, 아날로그 제품의 작동감이 주는 감성, 옛날 노래에 대한 관심 등등 하나의 물건에 다양한 심상이 덧입혀져 새롭게 해석된 구식과 낡음이 가치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이 물건은 여러 면에서 박물관의 소장품과 역할이 닮아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확대된 ‘민속’의 개념 범위 관련, 근·현대 자료의 중요성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집 및 보존하기 시작하였다. 박물관에서 특정 주제에 따라 전시를 기획하다 보면 맥락에 따라 근·현대 소장품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양한 연출로 전시된 유물 앞에서의 관람객들의 반응은 여러모로 갈리게 마련이지만, 훌륭한 전시 자료를 보고 감탄하는 모습과 함께 왕왕 볼 수 있는 것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근·현대 생활사 자료를 크게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순식간에 해당 전시물들과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 같이 온 일행들에게 관련 이야기를 풀어 놓기 바쁘다. 박물관 소장품은 하나같이 그것을 만들거나 사용했을 당시 사람들의 문화적 행위, 곧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물건들이다. 비교적 제작 혹은 활용 시기가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근·현대의 자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오래되지 못한 탓’에 집단 혹은 개인의 옛 경험을 현재의 추억으로 불러내는 능력을 갖게 되기도 한다.

 

집단의 기억을 담은 태극기
국립민속박물관에는 11년 전 2002년, 우리나라 전역이 월드컵으로 달아올랐던 당시의 열기를 고스란히 소환할 수 있는 현대 소장품 한 점이 있다. 바로 한국 축구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대형 태극기월드컵 자료 000129이다. 붉은악마의 의뢰로 ㈜○○플래그라는 업체에서 제작한 것으로 2002년 4월 27일 한중 축구팀 평가전부터 사용되었는데, 크기가 가로 60m. 세로 40m에 달하며 무게도 약 1t에 가깝다. 펼쳤을 때의 넓이는 2,400㎡가 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평’으로 환산해 보면 약 726평에 달한다. 워낙 큰 크기로 인해 몇 해마다 상태 점검 및 포쇄曝曬을 위해 펼칠 때를 제외하고는 그 전체의 생김새를 볼 기회조차 없는 이 태극기는 단지 거대하다는 것에만 의미를 둘 수 없다. 필자는 태극기가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던 2002년 6월 29일 대구 경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태극기 기증 협의를 위해 한국과 튀르키예의 경기 전 붉은악마 관계자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만났으며, 이윽고 시작된 경기에서 거대한 태극기의 마지막 활약을 보게 되었다. 역대급의 성적을 거둔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일까? 10여 년이 지난 2023년 6월에도 이 태극기에 묻어 있는 당시의 함성이 지워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된다.

2002 월드컵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작년 2022년에 국립민속박물관과 MBC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2022 카타르월드컵 개막 직전에 이 대형 태극기를 방송으로 선보일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박물관의 소장품이기에 관리 기준을 충족하면서 전체를 다 펼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하였기에 결국 이루지 못한 바람이 되고 말았다. 2002년 당시 태극기 제작을 위한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결국 대구시청 앞마당에 전기를 끌어 재봉질로 원단을 이어 붙이고, 대구공항 내 활주로 한 켠에서 태극과 괘를 그려 넣었다는, 다큐멘터리 기획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이야기도 태극기를 보관하는 대형 나무상자에 아쉬움과 함께 접어 넣었다. 언제인가 기회가 되면 다시 시도해 볼 요량이다.

 

개인의 기억과 닿은 생활재
국립민속박물관의 근·현대 소장품 중에는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 실제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재가 상당수이다. 대부분 소소하기 그지없지만 돌아보면 이미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들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당시의 생활공간 재현이 가능할 정도의 근·현대 물품들을 수집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도 필요에 따라 수집을 진행하고 있다. 요즘 물건들도 오랜 기간 박물관 수장고에서 안전하게 묵혀두면 나중에는 귀중한 물건이 되지 않겠냐고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생활사를 전문 분야로 삼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근·현대 자료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물질 및 그에 연관된 생활문화의 보존과 연구에도 목적이 있다. 전통사회에서 현대까지의 생활문화의 다각적 변화 과정 중 근·현대 역시 연속적이고 중요한 한 단락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급격한 산업화를 겪어낸 뒤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뒤얽힌 산업구조 탓에 재화의 소비 주기가 짧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쓸모를 잃어버린 많은 물건들이 이미 버려져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는 가끔 떠오르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간혹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가까운 과거의 물건들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마치 그 안에서 자신을 찾은 듯 열렬하다. 현재 전시 개선을 위해 문을 닫은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 1 ‘한국인의 하루’ 끝부분에는 산업화 이후 가족 중심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와해되고 각자의 사회적 역할이 주어짐에 따라 가족끼리도 생활 패턴이 달라진 ‘근·현대의 하루’가 구현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를 위해 차려진 밥상, 그 위를 덮고 있는 상보, 지어 놓은 밥이 식지 않도록 주발을 아랫목에 넣어두기 위해 만들어 사용한 주머니 등이 전시물의 일부로 설치되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지극히 일상적인 물건들인데, 이를 통해 관람객들이 기억해 내는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몰래 듣고 있자면 개인적이면서도 공통적이고 따뜻하기도 하면서 슬프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옛 상설전시1 끝부분의 ‘근·현대의 하루’

생활상을 담은 다양한 근·현대자료
박물관의 ‘박물博物’은 여러 시대를 거쳐 오늘날 우리의 문화를 있게 한 생활사의 한 지점, 그 시기의 문화를 알려주는 매개체이다. 조선 혹은 이전까지도 소급되는 유물들이 그러하고, 가까운 근·현대의 자료들 역시 그러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이 30년 전 경복궁 안으로 자리를 옮긴 후 확충된 수장고에 다양한 근·현대 수집품을 차곡차곡 쌓아 보존해 왔던 이유이다.

혹 국립민속박물관에 찾아오게 된다면 상설전시 2 ‘한국인의 일 년’에 등장하는, 변화된 생활 속에서도 전통과 맥을 같이 하는 근·현대 자료들, 가까운 과거의 생활상이 재현된 야외전시장 ‘7080 추억의 거리’ 등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 생활문화사의 소중한 일부가 된 여러분의 모습을(혹은 여러분의 부모이거나 조부모일지도 모르겠지만) 발견할 지도 모른다.


글 | 김창호_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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