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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기덕(奇德, 엘리자베스 키스)이 그린 Old Korea

영국 출신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8~1956는 조선을 비롯한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풍경과 풍습, 인물을 담은 판화와 수채화로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이다. 그는 1919년을 시작으로 조선을 방문해 당시의 풍속의 장면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조선을 소재로 한 26점의 판화와 두 권의 저서가 소장되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에버딘셔Aberdeenshire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성장했던 엘리자베스 키스는 28세 되던 해인 1915년 언니 엘스펫 키스Elspet Keith, 1875~1956 부부의 초청으로 두 달 일정으로 처음 일본에 가는데, 이후 약 6년이 넘도록 일본에 살면서 일본을 비롯한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의 풍경과 풍습, 인물을 담은 180여 점의 판화와 수채화를 남겼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동양에서의 생활과 경험은 두 권의 책에 기록되었는데, 한 권은 1928년 언니인 엘스펫 키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편집하여 출간한 여행기 “Eastern Window”이고 또 다른 한 권은 1946년 출간된 “Old Korea-the Land of Morning Calm” 이다.도1

도1. “Eastern Window”, 1928, (민속40795)과 “Old Korea-the Land of Morning Calm”, 1946(민속65770)

엘리자베스 키스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작가로서의 역량을 펼쳤던 화가였다. 그는 1919년 3월 언니와 함께 한국을 여행하였는데 이때 보았던 조선에서의 풍습과 풍경, 인물들을 그린 그림을 1920년 5월 도쿄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전시 하였다. 당시 교토에서 활동하던 판화 출판업자 와타나베 쇼자부로渡辺 庄三郎, 1885 – 1962는 이 전시에 나온 그림을 보고 키스에게 목판화 작업을 제안했고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 도2을 목판화로 만든다. 이 작품이 주목받게 되면서 이후 수채화를 목판화로 바꾸는 작업에 매진하게 되고 1921년 6월 도쿄에서 최초의 엘리자베스 키스의 판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에는 조선의 풍물을 소재로 한 다수의 판화가 출품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전시회의 성공에 힘입어 키스는 본격적인 판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와타나베 쇼자부로는 당시 서구의 고객이 요구하는 고전적인 동양 이미지를 판화로 만든 이른바 일본 ‘신판화新版畵’를 개척하였다. 그는 이토 신수이, 가와세 하수이와 같은 일본 작가를 비롯해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서양인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키스의 스승인 버틀렛이 그중 한 명이었고 스승의 영향으로 키스 역시 자연스럽게 신판화와 연결되었고 그들 중 가장 성공한 신판화의 대표작가로 부상하였다.

도2. 엘리자베스 키스,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민속40784) | 1920 | 가로 44 x 세로 32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업, 선교, 관광 등을 목적으로 동아시아를 방문한 서양인들이 키스 판화의 주요 소비층이었다. 키스의 작품은 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동양의 관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당시 서구화된 동양의 도시나 모습이 아닌 동양의 전통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강조했고, 동양적인 원색과 서양의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간결하고 세련된 묘사로 표현해내어 주 소비층인 서양인들에게 크게 주목받았다. 1929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판화 전시회를 마치고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모두 동양 주제에 대한 서양적 접근을 했음을 밝혔고 영국과 미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인기가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음을 스스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키스는 작품 속 장소를 직접 여행하며, 그 과정에서 목격하고 만났던 대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당시 동양을 가보지도 않고 동양풍의 작품을 양산해 냈던 많은 서양 작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1920~30년대 동아시아에 대한 서구인들의 막연한 호기심을 키스의 사실주의적 판화가 충족시켜 준 것이었다. 마침 당시 서구에서도 판화의 인기가 올라가던 시기와도 맞물려 엘리자베스 키스는 동서양의 화단에서 큰 성공을 얻게 된다. 지금의 한국에서 키스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 또한 이와 동일하다. 멀리 광화문과 해치상을 배경으로 방한모인 남바위에 한복을 차려입고 정월 초하루 나들이를 나온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이나도3, 금강산에 있는 어느 절 부엌의 식사 준비 모습에서 대량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올라앉을 정도로 큰 부뚜막이 있는 사찰 부엌의 모습, 벽에 붙어있는 부엌의 신인 조왕신의 모습도4 등 사실적인 묘사는 사진에 버금갈 정도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키스는 조선에서 전시회를 열고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들과 교류하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다시 한국을 찾은 키스는 그해 가을 서울에서 서양화가로서는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어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선교사 등은 물론 한국 사람들도 다수 왔다고 한다. 이후 키스는 1934년에 두 번째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었다. 당시 조선에서 의술을 폈던 로제타 홀과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키스에게 도안을 의뢰하였고 부탁을 받은 키스는 1934, 1936, 1940년 등 세 번에 걸쳐 도안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키스는 ‘기덕奇德’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도3. 〈정월 초하루 나들이〉(민속40792) | 가로 27.5 x 세로 40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도4. 〈금강산 절 부엌〉(민속40789) | 가로 54.5 x 세로 65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러나 그림으로서의 그의 작품에 대한 미술사 또는 미술비평의 관점과 평가는 다양하다. 그가 목격했던 이국적인 동양의 풍경을 단지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렸을 뿐이라는 평가가 있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당시의 강대국인 영국의 국민이면서 또 다른 동양의 강대국인 일본에 주된 거점을 둔 식민국가의 지배자적 시각에서 조선에 대한 감상적이고 연민적인 시각이 들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키스가 당시 미술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일본의 하위문화로서 조선 및 타 아시아 국가를 소재로 삼았다는 평가도 있다. 즉 전반적으로 그의 시각은 당시의 여러 외국인처럼 무의식적인 오리엔탈리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 담겨 있는 조선의 집과 복식과 사람들 그리고 풍속은 당시의 민속을 생생히 담고 있어 민속이나 사회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글 | 김윤정_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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