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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을 담는 제기祭器

종가에 가면 대청의 시렁 위에 가득 올려진 소반이나, 제기고에 종류별로 잘 정돈되어 있는 제기를 볼 수 있다. 특히 켜켜이 포개져 있거나 종류별로 가지런하게 정리된 제기들을 보면 왠지 모를 숙연함이 느껴진다. 이젠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개방형 수장고에서도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의 의미와 재질별 용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단순한 형태로 정성껏 제물을 담아내는 그릇
제기는 제사에 쓰는 모든 도구를 말하는데, 좁은 의미로는 제물을 담는데 쓰는 그릇을 뜻하기도 한다. 제사가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한다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뜻에서 비롯되었듯이, 제사에는 처음에 나무나 흙으로 만든 질박質朴한 제기를 썼고, 제기의 형태나 문양은 대개 사물이나 신체에서 취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국가 제사가 왕실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였기 때문에 제기를 놋쇠나 철로 만들면서 용·봉황鳳凰 등 상상 속의 동물이나 산·우레[雷]같이 위엄이 있는 문양을 장식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반면에 집안에서 쓰는 제기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뜻을 이어받아서 단순하면서도 투박하게 만들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문헌에 나오는 국가 제기와 다르게, 집안의 제기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실제 생활에 쓰는 단순한 그릇 형태로 정성껏 제물을 담아내는 것에 힘썼다. 다만 제기를 생활 용기와 구분하기 위해 굽을 높게 한다거나, 도자 제기의 경우, 접시에 ‘제’자를 쓰기도 하고, 근본에 보답하기 위해 정화수를 떠서 올리는 현주병에는 ‘현주병玄酒甁’이라 하여 술병과 구별하기도 하였다.

제기는 제기고 또는 제기궤에 보관
예로부터 제사는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제사에 쓰는 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예기禮記』에는 군자가 가난할지라도 제기를 일상생활에 쓰지 말며, 남에게 빌려서 쓰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은 『서의書儀』에서 주발ㆍ대접 등의 기물을 별도로 비치하여 오직 제사 때에만 쓰게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가례家禮』에서 제기는 수량대로 모두 갖추어 제기고祭器庫 안에 넣어 잠가 두고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게 하고, 제기고가 없으면 제기궤祭器櫃 안에 넣어 두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신의경申義慶, 1557~1648과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는 가난하여 집터가 좁아 한 칸의 사당을 세울 경우, 제기는 사당 안 동쪽에 제기궤를 놓고 보관하게 했다. 그래도 가난해서 제기를 갖출 수 없는 집의 경우, 평상시 쓰는 그릇[燕器]을 대신 사용해도 좋다는 『가례의절』에 따라 부득이하게 일상의 그릇을 제기로 쓰기도 하였다.

 

제물에 따라 제기 이름도 제각각
제기는 제물을 담아 올리는 것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따르면 제사상에 올려놓는 제기는 술을 따라 올리는 술잔과 잔대[盞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발[椀] 또는 대접大楪이다. 형태는 주발이지만, 메를 담는 반기飯器, 갱을 담는 갱기羹器, 국수를 담는 면기麵器라고 구분하였고, 대접이지만, 숟가락과 젓가락을 담는 시저접匙筯楪, 초를 담는 초접醋椄, 과일을 담는 과기果器, 포를 담는 포기脯器, 식해를 담는 해기醢器, 나물을 담는 소채기蔬菜器, 적을 담는 적기炙器, 떡을 담는 병기餠器라고 구분하였다. 적과 떡은 후대에서 높이 괴면서, 굽이 낮은 사각의 모판으로 변용하여 썼는데, 적기는 적틀, 적대, 떡은 떡틀, 병틀, 병대라고 하였다. 반면에 생선이나 고기를 담는 어육기魚肉器의 경우는 대접 또는 주발을 썼다. 그리고 『격몽요결擊蒙要訣』에 탕과 간장을 진설하면서, 탕을 담는 탕기湯器와 간장을 담는 장기醬器가 추가되었는데, 탕기는 주로 주발을, 간장은 종지[鍾子]를 썼다. 이와 같은 제기 이름을 『초종제례가初終祭禮歌』의 진설 내용에 옮겨보면, 다음과 같이 제물에 따른 제기 이름과 제사상 차림을 알 수 있다.

첫째 줄 거동 보소 / 동쪽은 국[갱기], 서쪽은 메[반기] 가장자리 놓고 / 동쪽은 초[초접], 서쪽은 잔반[술잔과 잔대]에 / 중간에 숟가락과 젓가락[시접]을 놓아두네. / 둘째 줄을 볼 것 같으면 / 동쪽은 떡[병기], 서쪽은 국수[면기] 가장자리에 놓고 / 동쪽은 생선, 서쪽은 고기[어육기]를 올리며 / 중간에 적[적기]을 올리네 / 셋째 줄에 놓인 거동 / 동쪽은 침채[소채기], 서쪽은 건포[포기]이며 / 동쪽은 식해[해기], 서쪽은 나물[소채기]이며 / 중간에 청장[종지]을 놓아두네. / 넷째 줄 볼 것 같으면 / 여섯 가지 실과[과기]를 벌여 놓았네.

제물의 특성에 따른 재질별 제기 사용
제기는 대개 집안 형편에 따라 놋쇠, 나무, 도자 등으로 만들어 썼다. 그중에 놋쇠로 만든 유기鍮器는 제작 비용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릇이 단단해서 운반하거나 보관하기 쉽고, 무엇보다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에 주로 부유한 계층에서 썼다. 반면에 일반 계층에서는 제작하기가 쉽고 가벼운 목기木器를 주로 썼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목기는 검소하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 모두 제기로 써도 무방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례』에서 실생활에서 쓰는 그릇[燕器]도 허용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부유한 계층에서는 기제나 차례에는 조상 대대로 쓴 유기를 쓰면서도 목기를 아울러 쓰기도 하며, 묘제에는 운반하기 쉬운 목기를 쓰거나, 심지어 종이로 만든 제기를 쓰기도 하였다. 또 제물의 특성에 따라서 재질별로 제기를 나누어 쓰기도 했다. 가령 술을 따르는 술잔이나, 메, 갱, 국수, 탕 등 따뜻한 제물을 담는 제기의 경우는 대개 뚜껑이 있어서 주로 유기를 쓰고, 과일, 나물, 식해, 포 등을 담는 제기는 유기 또는 목기를 썼다. 그리고 어적, 육적이나 떡을 괴는 제기는 주로 목기를 썼다. 그리고 술이나 물을 담는 술병과 현주병은 도자 제기를 썼고, 향을 태우는 향로는 향합과 세트로 유기 또는 도자 제기를 썼다.

이젠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도자 제기
국가 제기 가운데 술을 담는 희준犧尊 등의 도자 제기는 국가 제사에서 제사 대상이 늘어나거나, 임진왜란 등으로 구리 등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도자 제기는 깨지기 쉽고 무거워서 운반하거나 보관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후대에 국가 제기는 대부분 유기로 제작되었다. 민간에서도 제기를 마련하기 힘들 경우, 유기와 목기 이외에 도자로 제기를 제작하여 썼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에서 “세속에서 도자 제기를 쓴 것은 옛날에 없었던 일로 요즘에 생겨난 일이다. 그 깨끗하기가 목기에 칠을 한 것보다 훨씬 나으며, 마련하는데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으니, 이것을 사다가 따로 보관해 두고 일반 그릇과 서로 섞이지 않게 한다면, 또한 고금古今의 의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도자 제기의 사용을 권하였다. 도자 제기는 값싸게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고 깨끗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제물이 배어들어 얼룩이 지거나 쉽게 깨져서 일괄적으로 제기 일습을 맞추기 어려웠고, 또 무거워서 운반하거나 보관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제사현장에서 도자 제기를 사용하여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도자 제기도 드물뿐더러, 이젠 도자 제기의 값도 비싸고, 또한 별도로 제작하기도 어려워서, 도자 제기는 실제 제사현장보다는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제기가 되었다.

이러한 도자 제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의 열린 수장고인 11수장고이다. 이곳에 가면 진열장에 종류별로 놓여진 각종의 백자 제기를 볼 수 있다. 단지 한두 개의 대표적인 제기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같은 백자 계열의 접시, 면기, 탕기, 잔과 잔대, 모사기, 향로, 향합 등이 진열되어 있다. 이를 보면 마치 제기고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제기 마냥, 실제 제물은 없지만 마치 제사를 지내는 듯이 추원보본의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제기의 정갈함과 숙연함을 느낄 수 있다.


글 | 최순권_어린이박물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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