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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 이랜 들어봅데강?

(왼쪽부터) 웃데기 허벅, 알데기 허벅, 허벅 능생이, 대배기(대바지), 애기대배기

‘허벅’이랜 들어봅데강? ‘허벅’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얼마 전 TV에서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동안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는 꽤 있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에서는 배경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살아내는 삶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대부분 제주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필자는 배우들이 쓰는 억양, 단어 등을 모니터링 하듯이 드라마를 봤다. 물론 내가 나고 자란 제주풍경을 보는 반가움이 더 앞섰다. 제주는 해안가의 돌도, 밭의 경계인 돌담도, 묘지를 둘러싼 산담도, 빌레의 바위도, 올레길의 돌담도 모두 까맣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현무암玄武巖이라서 그렇다. 제주도는 화산분출에 의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회토火山灰土 지형이다. ‘허벅’은 제주 지역의 흙, 즉 화산회토로 만들어진 제주옹기甕器이며, 상수도 시설에 의한 식수 공급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물을 길어 나르는 데 사용했던 생활 용구이다. 외반한 구연부口緣部에 목은 좁고 어깨가 팽만한 대병大甁 형태로 ‘구덕’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넣고 등에 지고 다녔다. 이쯤 되면 ‘제주ᄌᆞᆷ녀(해녀)’ 조각상과 더불어 허벅진 여인 조각상을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 한 번쯤 보았던 기억이 날 수도 있다. 허벅은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제주 사람들에게 필수용기였다. 대체용품이 대량생산되고 식수공급시설의 일반화로 허벅은 급속히 사라져 현재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 있다. ‘허벅’이라는 명칭은 제주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용어이나, 지역에 따라 ‘허베기’, ‘헙데기’로도 불렀다. 명칭의 유래는 분분하다. 고려시대 여몽전쟁 이후 약 백 년간 몽골이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말을 키우는 일에 힘썼는데 당시 목자牧者들이 사용했던 이동용 가죽 주머니로 말안장의 양쪽으로 매달아 사용했던 가방인 ‘허스 벅츠’에서 왔다고도 하고, 몽골인이 우물에서 물을 끌어 올릴 때 썼던 가죽 주머니인 ‘허워(버)’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물동이처럼 머리에 이지 않고 등에 지고 다녔던 허벅
허벅으로 물 긷는 풍속은 연원이 오래되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824년순조24 『정헌영해처감록靖獻瀛海處坎錄』, 탐라잡영耽羅雜詠편에 “물 긷는 여자들은 큰 병[大甁]을 대바구니竹筐에 넣어 지고 다닌다.”라는 표현은 최근까지 허벅을 사용하던 모습과 같다. 운반 방법으로는 대바구니竹筐를 사용하고 있는데,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기록된 제주도 풍속에는 물병을 대바구니에 넣어 등에 지고 다녔던 이유를 길이 험하여 엎어지기 쉬운 까닭이라고 하고 있다. 제주도는 화산분출에 의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회토 지형이어서 비가 오면 물이 땅으로 빠져 해안가에서 물이 솟아나는 용천수湧泉水나 봉천수奉天水가 있는 곳까지 물을 긷기 위해 가야만 했다. 허벅은 물을 가득 담은 채 넘치지 않고 운반하기 위해서 어깨와 배는 부르고 목은 좁게 만들어졌으며, 돌이 많아 노면 상태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머리에 이지 않고 등짐운반을 했다. 허벅을 비롯하여 각종 물건을 운반할 때 ‘지고이지는 않는다負而不戴’라는 제주도 풍속은 이와 같은 자연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내륙지방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과거 문헌에 언급되고 있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도 “물을 긷는 데 사용하는 물통水桶이며, 크기는 5~6되의 물이 들어가는 토기병[土甁]이고, 운반 방법은 여성들이 허벅을 물구덕竹籠에 넣고 등에 질빵으로 걸러 메고 다녔다”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5~6되면 약10~11kg 정도이고 여기에 허벅의 원래 무게까지 더해지니 무거웠을 것이다. 이렇게 길어온 물은 허벅을 등에 진채 질빵을 조절하여 옆으로 기울여서 커다란 통개항아리로 쏟아부었다. 제주도엔 집집마다 부엌 근처에 허벅을 올려놓을 수 있는 판석 모양의 넓은 ‘물팡돌’이 있었다. 물론 이것도 현무암이다.

 

허벅, 등덜기, 방춘이, 능생이
허벅은 용도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생산·소비되었다. 그만큼 생활에 꼭 필요했으며 긴요하게 쓰였던 용기였음을 방증한다.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주문 생산했기 때문에 ‘맞춤허벅’이라고도 불렀던 가장 큰 ‘바릇허벅’, 성인들이 지고 다녔던 일반적인 ‘허벅’, 15~17세의 소녀들이 사용했던 허벅보다 작은 ‘대배기대바지’, 그리고 어린이용인 가장 작은 ‘애기대배기’가 있다. 허벅과 크기는 같은데 목구연부의 높낮이와 너비, 형태 차이에 따라 부르는 명칭도 다르다. 목이 더 좁고 구연부에 단이 있어서 깔때기 모양과 비슷한 ‘허벅등덜기’, 구연부가 조금 낮고 넓은 ‘허벅방춘이’, 구연부가 가장 낮고 넓은 ‘허벅능생이’가 있다. 소비자가 무엇을 담는지에 따라서 물허벅·술허벅·죽허벅·씨허벅·오줌허벅 등으로도 불렀다. 더불어 허벅을 건조하거나 재임할 때 짝을 이루며 다양하게 쓰였던 ‘망대기’와 ‘장태’도 빠질 수 없다. 제주옹기는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구워냈다. 굽는 과정을 통해 흙이 자화磁化되고 땔감에 의한 자연유나 흙 자체의 성질과 불길에 따라 반질반질한 붉은 색감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화산회토의 특성과 현무암으로 축조된 돌가마石窯에서 구워지기 때문이다.

 

코조록 하멍 타부룩 하게
허벅의 제작방법은 분업화되었고 굴가마은 계로 운영되었다. 『도점계좌목陶店禊座目』에는 1910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옹기굴계의 정규가 적혀있어 굴계의 운영 방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건애꾼은 제작준비·건조 등 허드렛일을 하고 물레대장은 허벅을 만들며 굴대장은 가마 안에 굴들임재임을 하고 불대장은 굽는다. 허벅 표면에는 빗살문양의 ‘보로롱무늬’가 있다. 물레대장이 제작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대나무로 얇게 만든 ‘술테’라는 도구를 허벅의 표면에 어슷하게 대고 물레를 돌리면, 물레가 돌아가는 방향과 술테를 끌어당기는 방향이 달라 술테가 탁탁 튀면서 사선으로 무늬를 찍는다. 이때 ‘보로롱’하고 소리가 나기 때문에 ‘보로롱무늬’라고 한다. 제작과정에서 이 소리는 물레대장과 건애꾼 사이의 호출 신호이기도 하다. 이 소리가 들리면 건애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물레 위에 완성된 허벅을 이동할 준비를 한다. “허벅은 코조록 하멍 타부룩 하게 맨들어사…(목은 좁으면서 배는 부르게 만들어야…)”는 장인들 사이에 통하는 허벅 성형의 정의이며 허벅의 기능적·조형적 특징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글 | 이경효_어린이박물관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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