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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마음의 구김살을 펴는 인고침 다듬잇돌

하지夏至를 지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봄옷을 정리해 옷장에 넣고 새롭게 꺼낸 여름옷을 세탁기에 넣어 세탁과 건조, 다림질까지 말끔히 해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이 과정이 귀찮아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등 가전제품이 우리를 간편한 생활로 이끈다. 간혹 집에서 처리하기 어렵거나 시간이 없으면 세탁소에 맡기기도 한다. 그래도 여름에는 다른 계절보다 옷을 자주 세탁해야 하는데, 세탁기조차 없었던 전통사회에서는 어떻게 관리했을까?

전통사회에서 옷을 세탁하는 것은 현재 세탁방법과 다르다. 현대사회에서는 옷을 색과 재질 정도 구별해서 세탁기에 넣어 빨래하고 건조한 후 스팀다리미로 다린다.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먼저 바느질했던 옷의 솔기를 조심히 뜯어 천 조각으로 되돌린다. 조각이 된 천을 냇가에서 방망이로 두들기고 흐르는 냇물에 흔들어 햇빛에 널어 말린다. 단추를 비롯한 부속물이 별로 없는 우리 옷은 방망이로 두들겨 햇볕에 말리면 더욱 부드럽고 하얗게 변한다. 특히 여름옷으로 사용되는 면, 모시 등에는 풀을 먹이고 발로 밟아 다듬잇돌에 올려 다듬이질을 한다. 혼자서 두드리거나 동서同壻 또는 고부姑婦가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하면 옷감은 윤기가 흐르고 때도 덜 타게 된다. 다듬이질이 끝난 천을 말라 바느질을 하여 저고리, 바지, 치마 등이 완성되면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가 끝난다. 세탁기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세탁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옷 솔기를 뜯어 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방망이로 두드리고 물에 헹궈 널어 말리는 과정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합성섬유가 보편화되면서 풀을 먹이는 푸새와 다듬이질하는 과정은 사라져 갔다. 다만 일부 가정에서 옥양목玉洋木1)으로 만든 이불을 세탁할 때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정 내 화합의 소리, 다듬이 소리
세탁기가 나오기 전에 다듬잇돌은 전통사회에서 의생활을 담당하는 생필품이었다. 거친 광목廣木2)이나 모시 등 전통 옷감을 관리하기 위해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는 것은 필수였다. 깊은 밤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어머니의 고된 삶을 연상시켰다. 수많은 집안일을 끝내고 가족들이 말끔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어머니는 깊은 밤에도 다듬이질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음날이 밝으면 다시 집안일에 매진하고 전날 다하지 못한 일을 이어나갔다. 힘든 다듬이질은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듬이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을 탈 때까지 마주 본 사람을 배려하고 참으며 방망이를 두드렸다. 두 사람의 마음이 잘 맞으면 다듬이 소리가 리듬을 타서 경쾌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주 끊겨 둔탁한 소리가 난다. 사실 다듬이질이 매끄럽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간격과 힘이 균일해야 옷감도 윤이 나고 부드러워진다. 듣기 좋은 다듬이 소리도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나오게 된다. 예전 어른들은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 집안의 화목을 확인하곤 했었다. 사실 다듬이질은 시어머니, 시누이, 며느리 등 집안 여성들이 주로 하였다. 서로 다른 성장 과정과 이해관계를 가졌기에 처음부터 화합을 이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방망이가 부딪치지 않고 옷감을 다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이 소리는 집안의 화목과 화합을 나타내고 다듬잇돌에게 인고침忍苦砧이라는 별칭을 안겨주었다.

 

생필품이자 혼수품인 다듬잇돌
의생활에 있어 생필품이었던 다듬잇돌은 혼수품이기도 하였다. 개방형 수장고 2층의 열린 수장고에는 다듬잇돌이 전시되어 있다. 수장고 내·외부 하단에 있는 다듬잇돌은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직육면체로 4개의 다리가 있는 형태이지만 사용된 재질이나 모양 등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반듯한 직육면체 모양의 소장품에서 상면上面이 완만한 곡선을 보이는 형태, 한옥 대청마루나 툇마루 앞에 놓인 댓돌 모양의 유물 등 다양하다. 또 다듬잇돌에 기원을 담은 문구나 꽃과 나비 등 여러 무늬를 조각하고 색칠까지 한 사례도 볼 수 있다. 다듬잇돌에 사용된 문구는 ‘자손창성子孫昌盛’, ‘수복壽福’, ‘천추만세千秋萬歲3)’ 등이 일반적이다. 10수장고와 11수장고 사이 의자에 앉으면 바로 눈앞에서 다양한 길상문자를 담고 있는 다듬잇돌을 볼 수 있다. 시집가는 딸의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면서 다듬잇돌을 준비했을 부모님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이외에도 계묘년癸卯年과 토끼를 함께 조각한 다듬잇돌도 있다. 내년이 바로 돌아오는 계묘년이라 수장고에서 한번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수장고를 돌며 다듬잇돌을 살펴보면 길상문자와 함께 다양한 무늬가 보인다. 꽃무늬가 가장 많이 보이고, 나비, 박쥐, 토끼 등 동물무늬와 기하무늬도 보인다.

근대 의생활 개선의 대상, 다듬이질
시집가는 딸을 위해 무늬를 새기고 색을 칠할 정도로 귀하게 마련했던 다듬잇돌은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의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한복개량운동과 더불어 다듬이질을 근절하자는 내용이 의생활 개선 운동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의복에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이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여성들도 배워야 하는데 집안일에 시간을 많이 써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복 세탁과 관리에서 근절해야 할 활동으로 다듬이질이 꼽힌 것이다. 학교 교복을 시작으로 단추와 다른 부속물이 달린 서양복이 들어왔고 점차 다듬이질이 필요 없는 직물들이 우리 의생활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관리하기 힘들고 불편한 모시와 삼베옷은 멀리하게 되고 관리하기 용이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게 되었다.

다듬잇돌은 우리 의생활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무명, 삼베, 모시 등 전통 섬유를 이용해 의복을 마련했던 전통사회에서 다듬이 소리는 좋은 징조를 상징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이 되기 전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어 길몽吉夢으로 여겼다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다듬잇돌에 대한 금기도 다양했다. ‘빈 다듬이질을 하면 어머니 마음이 상하게 된다’거나 ‘다듬잇돌을 깔고 앉으면 재수 없다’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다듬잇돌은 점차 근절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여성들을 가사노동에 매여 자신을 계발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복을 개량해야 하는 이유와 유사할 것이다. 서양복이 우리 옷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한복은 예복이나 명절에 입는 옷이 되어가면서 다듬잇돌은 우리 생활에서 사라졌다. 어린 시절 이불 빨래하던 어머니를 도와드렸던 기억이 난다. 이불을 뜯어 솜과 분리시키고 세탁을 한 후 풀을 먹이고 옥양목 천을 곱게 접어 보자기로 싼 다음 접은 천을 발로 꾹꾹 밟았다. 그리고 다듬잇돌 위에 올려 박달나무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어머니 흉내를 내며 다듬이질을 했었다. 처음에 맞지 않던 호흡은 어머니의 방망이 두들기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박자를 맞추자 담듬질이 어우러지기 시작했고 다듬이 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어머니의 인고침인 다듬잇돌을 10수장고 옆 의자에 앉아서 보고 있자면 다듬이질을 하며 미소 짓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1) 평직으로 짜서 표백한 면직물의 일종
2) 무명실로 형광, 표백처리를 하지 않은 광폭(廣幅)의 천
3) 천추는 천만년을 의미하며 천추만세는 오래살기를 기원하는 의미임.


글 | 이수현_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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