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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

시계, 그 이상의 가치

시계, 인류의 역사를 바꾸다
19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시간을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시간을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멈춘 적은 없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밖에 되지 않는다. 시계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해가 있는 낮과 해가 없는 밤으로 하루를 구분했다. 그러나 하늘 위 태양만 올려다 보고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닥에 막대를 세워 놓고 시간의 흐름을 알아갔다. 기원전 약 3천 5백 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만든 최초의 해시계가 바로 그것이다. 기원전 1500년 경 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라는 큰 기둥이 해시계 역할을 했다.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그중 하나였다. 기원전 1380년경 이집트에서는 물이 일정한 비율로 떨어지도록 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은 커다란 물통을 이용한 물시계가 등장했다. 이후 이집트와 중국, 아랍에서는 수백 년 동안 새로운 물시계를 개발해 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해시계는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무용지물이 되었고, 물시계는 날씨가 추워 물이 얼면 시간을 측정할 수 없었다. 1300년대까지는 종Bell이 달린 물시계나, 눈금을 그려 넣은 양초나 기름 등잔이 시계 역할을 대신했다. 1200년대 유럽의 유리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등장한 모래시계도 1600년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의 등장
태양이나 물, 불, 모래 같은 자연을 이용한 시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힘으로 움직이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 즉 기계식 시계가 마침내 등장한 것은 1200년대 말이다. 기계식 시계를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프랑스 수도원의 수사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기도를 올렸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쇠로 만든 톱니바퀴로 이루어져 있다. 줄에 매달린 추가 서서히 내려가면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망치를 움직여 종을 울렸다. 수도원에서는 아침이면 당번 수사가 이 종소리를 듣고 교회 종을 쳐서 다른 수사를 깨웠다고 한다. 이로서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시간으로 나누기 시작했고, 교회 종소리에 맞춰 생활했다. 낮과 밤의 길이와 상관없이 한 시간의 길이가 일정해진 것이다. 14세기, 파리와 런던, 밀라노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교회 탑에 설치된 거대한 시계가 종소리로 정시를 알렸다. 이후 정시뿐 아니라 15분 단위로 종을 치는 시계도 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시곗바늘이 아닌 종소리로 알려주었기 때문에 눈이 아니라 귀로 알수 있었다. 중세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시계는 워치Watch가 아닌 클락Clock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눈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시계 바늘이 등장한 것은 1344년경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에서였다. 태양과 달의 주기를 함께 보여주는 천문학 시계였지만, 하나의 바늘로 시각 표시만 하는 단순한 형태였다. 이 시기에는 천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 등을 나타내는 다양한 형태의 클락이 중세 유럽의 각 도시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계 태엽의 등장
톱니바퀴가 한 번에 한 톱니씩만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게 하는 ‘탈진기’가 발명된 후 시계 제조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광장의 시계탑이나 성당의 ‘공공 시계’에 국한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을 사유할 수 없는 것처럼, 시계 역시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공공을 위한 시계가 유럽의 주요 도시와 성당 등에 보급되면서 왕과 귀족들은 백성들과 공유하는 시계가 아닌 자신만의 시계를 갖길 원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5세기에 들어서자 시계공들은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원동력을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태엽이다. 무거운 추가 사라지고 태엽이 시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시계의 크기는 현격하게 작아졌고 운반도 가능해졌다. 최초의 회중시계는 16세기 초 독일 뉘른베르그의 시계 제작자이자 열쇠공이었던 페터 헨라인이 만든 것이었다.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줄이 달린 동그란 모양이 흡사 달걀처럼 생겨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예술품에 가까운 시계
구형에 가까운 펜던드형의 시계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편안한 납작한 포켓 워치의 형태로 변모해갔다. 그리고 시간도 더 정확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시계는 아주 값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에는 부호들이 늘어났고, 동양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동양의 왕족들도 유럽의 신기한 발명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값비싼 시계를 구입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자연스럽게 시계 제작자도 늘어났다. 유리를 덮어 시계 바늘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고, 케이스를 정교하게 조각하거나 에나멜과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회중시계가 등장한 것도 이 때였다. 복잡한 달력이나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계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도 모두 시계를 휴대하기 시작했던 16세기 이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회중시계 보다는 벽시계나 탁상시계를 사용했다. 당시 시계 제조 기술로는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받은 충격을 견딜 무브먼트는 없었기 때문에 회중시계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다. 벽시계와 탁상시계가 회중 시계보다 정확할 수 있었던 것은 1657년 네덜란드의 수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명한 진자 시계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영국과 네델란드에서 진자 시계를 발전시킨 장치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시계의 정확성도 눈부시게 향상됐다. 1755년 영국의 시계제작자 토머스 머지가 레버식 탈진기인 앵커 탈진기를 발명하면서 휴대용 시계도 더 정확한 시간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최초의 기계식 시계를 발명한 이름 모를 프랑스의 수도사부터 최초의 휴대용 시계를 만든 독일 뉘른베르그의 페터 헨라인, 진자 시계를 발명한 네덜란드의 수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그리고 앵커 탈진기를 만들고 발전시킨 영국인 토머스 머지와 G. 그라함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이전 시계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에는 스위스인이 없다. 그러나 현대 시계의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나라는 바로 스위스다.

세계 시계의 심장부, 스위스
언제부터 스위스 시계가 세계의 시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격동의 16세기로 시계 바늘을 되돌려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종교전쟁인 위그노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으로 존 칼뱅이 이끈 신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그들 대부분은 시계 제조, 염색, 인쇄 등에 능한 수공업자였다. 당시의 제네바 사람들은 금세공술에 있어 뛰어난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제네바로 이주한 신교도들은 이들과 함께 시계를 만들어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팔기 시작했다. 제네바에 시계 제조 기술자들이 늘어나면서 1601년에는 제네바 시계제작자조합이 생겨났다. 이후에도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수학자와 천문학자 등이 스위스로 이주하면서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그 화려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18세기, 제네바의 시계 장인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인근에 있는 유라JURA 산막으로 이주해 자신만의 공방을 설립해 가족 단위 혹은 대규모로 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제네바 북부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유라 산맥은 시계 장인들의 재능과 기술을 훌륭히 수용해낸 고장이다. 특히 유라 산맥 내 발레 드 쥬Valley de Joux 지역은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스위스 정통 시계 브랜드의 본사와 공장 대부분이 위치해 있어 일명 ‘시계 계곡Watch Wally’이라 불린다. 추울 겨울이 6개월 정도 지속될 정도인 이곳은 험준한 산악 지역이라 살기에는 불편했을 수 있지만 시계 제조에 있어서는 마치 천해의 요새처럼 적합한 곳이었다. 이들은 선대부터 내려오던 금세공 기술에 시계 제조 기술까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길고 추운 겨울을 감자와 치즈만으로 연명하던 유라 지역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알프스 산맥이 스위스를 세계 최고의 관광 국가로 만들었다면 유라 산맥은 스위스를 시계의 나라로 만든 기계식 시계의 성지로서 스위스 시계의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곳이다.

시계 그 이상의 가치
19세기 자동차의 발명으로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20세기 후반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많았다. 2015년 스마트 워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기계식 시계의 종말을 예견하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히려 기계식 시계는 더욱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위스 시계산업협회에 따르면 코로나 펜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스위스 시계의 수출 실적은 사상 최초로 210억 스위스 프랑을 넘어섰다. 그 중 90% 이상이 기계식 시계가의 판매 실적이다. 20세기 중반 쿼츠 파동의 20여 년간의 기간을 제외하고 시계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특별하고 고귀한 물건으로서 추앙 받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대 이후 값싼 쿼츠 시계들이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기계식 시계가 가진 특별함을 그리워하기 시작했고 남들과 차별화된 가치를 지닌 시계를 찾기 위해 다시 기계식 시계에 눈을 돌렸다. 이로서 기계식 시계는 ‘소중한 시간을 담은 물건’으로 그 가치를 재평가 받고 있다.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어난 기계식 시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갈망은 분명 디지털 시대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트렌드다.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기계식 시계 열풍은 현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생활 속에서 기계식 시계는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마저 선사한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인간의 기술력과 장인 정신 그리고 주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계를 향한 마법 같은 열정은 앞으로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글 | 이은경_레뷰 데 몽트르 코리아 편집장, 시계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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