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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

우리의 소통을 도와준, 통신수단 변천사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말·글·표정·몸짓 등을 활용하다가 더 나은 소통을 위해 여러 가지 통신수단을 만들고 발전시켜 왔다. 이제,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소통을 도와주던 여러 가지 통신수단을 살펴보자.

소통 수단의 진화, 설렁줄부터 구식전화기로
현대와는 달리 통신수단이 많지 않았던 전근대에는 상대가 가까이 있다면 직접소통이 가능하였을 테지만, 거리가 멀어지고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면 소통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전근대의 통신수단을 살펴 보면, 원거리 통신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대뿐 아니라 설렁줄이라는 근거리 통신수단이 있었다. ‘설렁’은 처마 끝 같은 곳에 달아 놓아 줄을 잡아당기면 소리를 내는 방울을 말하며, ‘설렁줄’은 이 방울이 소리가 나도록 방울에 매어놓은 줄을 말한다. 설렁줄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했는데 주로 방과 방, 집 안과 밖, 집과 집을 연결해 사람을 부르거나 이웃 간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였다. 설렁줄에 관련한 이야기 중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별안간 방울소리가 떨렁떨렁 요란스럽게 나서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니 천장 한구석에 설렁줄이 매여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임꺽정』의 시대 배경이 조선 명종 시기16세기이니 설렁줄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진 통신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직접 물리적으로 통신을 시도했던 시기를 지나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으로 비약적인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통신수단 또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근현대 통신수단의 새로운 변화는 1844년 미국인 새뮤얼 모스의 ‘모스전신’부터 시작되었다. 통신수단에 전신이 들어선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초 전신도입일은 1885년 9월 28일인데, 서울-인천을 연결하는 전신이 가설되었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이 개국하면서 전신업무가 시작되었다. 전신도입 이후 1896년, 우리나라 최초 전화기가 경운궁덕수궁에 설치되었다. 경운궁에 설치된 전화기는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였는데, 수신기와 송신기가 따로 있었고 핸들을 돌려 교환국에 신호를 보내면 전화교환원을 거쳐 상대방과 통화하게 되는 자석식 단식교환기 방식이었다. 이 전화기로 백범 김구 선생의 목숨을 구한 일화가 있다. 김구 선생이 일본군을 죽인 죄로 사형이 집행된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황제가, 집행 당일 다급히 시외전화를 걸어 김구 선생의 사형집행을 취소하였다. 이후 1902년 3월 서울-인천 간의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1935년 3월과 10월 나진우편국, 경성중앙전화국 각각에 자동교환기가 설치되었다. 이후 유선전화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현대에 이르고 있다.

 

유선에서 무선으로, 인터폰에서 시티폰까지
기술 발전으로 집집마다 연결되었던 설렁줄은 그 역할을 다하여 19세기 말 등장한 유·무선전신과 유선전화가 원거리 소통을 담당하게 되었고, 1970년대에 등장한 인터폰이 근거리 소통을 맡게 되었다. 인터폰은 건물 안에서 방과 방, 집과 집 사이의 소통을 돕는 구내 연락용 전화기로 지금까지도 많은 가정에서 현관·주방·거실 등에 설치되어 초인종과 연동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학교·병원·공장·사무실 등의 사내 연락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인터폰은 기술 발전에 따라 실시간 영상을 비추는 비디오폰으로도 진화하였다. 2020년대 코로나19 유행으로 선별검사와 자가격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배달음식·택배 주문이 급격히 늘어나 집 내부인와 외부인의 소통을 이어주는 인터폰또는 비디오폰의 역할이 더 커지기도 하였다. 한편, 유선전화 시대에서 무선 휴대전화로 넘어오기 전에 널리 쓰였던 ‘삐삐’라고 불린 무선호출기가 있다. 영어로 ‘pager’라고 하는데, 1981년에 국내에 들어와 1982년 12월 15일 무선호출 서비스 시작으로 소통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무선호출기는 1990년대에 보편화 되어 1,000만 명이 넘는 사용자 수를 기록하며 소통의 한몫을 하는 통신수단이 되었다. 무선호출기는, 처음에는 발신자가 호출을 하면 신호음으로만 호출알림을 나타내었는데, 이후 기기 액정화면에 발신자가 보낸 숫자가 수신자의 화면에 표기되는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사용자들은 숫자로 표기된 은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실생활 언어를 함축한 ‘숫자식 언어’가 사회적으로 많은 유행이 되었다. 무선호출기삐삐 이후 1997년에 등장한 시티폰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 수만 있고 받을 수는 없는 발신전용 무선전화기로, 수신전용이었던 삐삐와 함께 사용되었다. 삐삐로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수신 받고 시티폰으로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나, 시티폰의 주파수 감도가 떨어져 신호중계기가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 근처가 아니면 통화 품질이 좋지 않았다. 이후 1997년 10월, 수·발신이 모두 가능한 개인휴대통신PCS 단말기 출시로 시티폰 사용자가 줄어들게 되며 결국 2001년에 사라지게 되었다.

더 작고 편리하게 진화한 벽돌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시티폰 이전에, 사실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7월 1일부터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휴대전화 1호는 삼성전자가 만든 SH-100으로,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IOC 위원 49명에게 처음으로 선보였다. 우리나라의 휴대전화 기술은 1990년대 후반부터 눈부시게 발전하게 되는데, 1999년 세계 최초로 카메라폰SPH-V200부터 TV폰SPH-M200, MP3 뮤직폰SPH-M2500, 손목시계형 휴대폰SPH-WP10을 잇달아 내놓았다. 음성통화 수단이었던 휴대전화기에 다른 기술을 융합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낸 것은 한국이 세계 최초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많은 휴대전화피처폰 제조사들이 다양한 제품으로 열띤 승부를 벌였지만, 2007년 애플가 만든 스마트폰인 ‘아이폰iPhone’의 등장으로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패러다임이 크게 뒤흔들리게 되었다. 스마트폰은 모바일 운영체제OS를 탑재하여 다양한 애플리케이션과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모바일 단말기를 일컫는다. 통화와 문자메시지같은 기본 기능뿐만 아니라 인터넷 접속, 영상·음악 재생, 금융 서비스 등 PC와 맞먹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현대를 살아가면서 빠질 수 없는 물건으로 꼽힌다. 스마트폰은 일반 휴대전화를 일컫는 명칭인 피처폰Feature phone 시대를 거쳐 2009년 아이폰 3GS가 등장하며 지금의 스마트폰 개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이폰이 너무 혁신적이었기 때문일까? 첨단 스마트폰 등장 이후에 사람들은 영상, SNS, 또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전혀 모르는 다수와 동시에 생각을 나누며 소통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PC 기반의 온라인 소통이 있었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더 진화된 웹으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모바일 기반의 온라인 소통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생활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사람 사이의 소통
지금까지 전근대 통신수단인 설렁줄부터 현대의 최첨단 스마트폰까지 통신수단의 변천과 그에 따른 소통 양상을 살펴보았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통신수단은 여러 가지로 바뀌고 대체되었지만, 사람들끼리 소통을 하고자 하는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 전화와 문자메시지, 또 직접 대면하거나 온라인 연락을 적절히 혼합해 소통하였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촉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을 3년째 비대면 소통 중심의 한정된 생활로 이끌었다. 제한적인 생활 가운데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과는 얼마나 꾸준히 질 높은 소통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지금 손에 쥔 스마트폰을 들고 연락처 버튼을 눌러 보면, 가까운 사이지만 오랜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로 쉬이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주욱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오늘만큼은 이들에게 그동안 머뭇거렸던 통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전해 보자. 그렇게 마음과 마음은 이어진다.


글 | 이하늘_여주시립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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