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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아현동 주변 일대, 봄이 오는 길목에 서성이다

봄이 저 멀리서 수줍게 걸어온다. 오락가락 변덕을 꽤나 부리지만 바람이 품은 기운은 한겨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니 봄은 봄이다. 오늘 찾아간 곳은 서울시 마포구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아현동 일대다.

어쩐지 서울에서 봄이 가장 먼저 맞이할 듯한 이곳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성부 시절, 이미 아현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만큼 긴 역사를 자랑한다. 사대문 밖에 있지만, 마포나루와 활인서원 등이 자리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후 많은 사람이 정착하였고 이후 현재까지 높은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가난했지만 인심이 좋았던 동네, 높은 언덕과 고개들 사이로 빼곡히 자리 잡은 다세대 주택들이 현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대규모 아파트단지들로 변화하고 있는 곳. 북아현동 가구거리, 아현웨딩타운 등 특성화 거리로도 유명한 아현동 일대로 봄을 찾아나서 보았다.

아현시장 그리고 대학의 봄
낯선 동네에 도달해 어딜 가야 할지 모를 때 시장을 가면 대개 실패가 없다. 군침도는 먹거리와 복작복작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풍경이 활기와 에너지를 100% 충전시켜주기 때문이다. 아현동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된 동네일수록 시장은 더 진한 지역색과 구수함을 풍기기 마련. 덕분에 발걸음은 아현시장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아현시장은 1930년에 처음 문을 연 재래시장이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먹거리가 풍성해 인근 주민들이 마음 편히 슬리퍼를 끌고 저녁 찬거리와 군것질거리를 사러 나올 수 있는 친근한 곳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소문난 맛집도 많아 일부러 타지역에서 찾아드는 손님들도 많다. 즉석튀김이 일품인 ‘마포분식’, ‘건강한 만두’의 표고만두, 주문과 동시에 구워주는 ‘서울호떡’, 뜨끈뜨끈한 전을 파는 ‘늘푸른식당’ 등에 유독 사람들이 몰려드는 풍경을 보니 지갑이 절로 열린다. 봄의 기운이 솟아서일까? 식욕도 가을 못지않게 올라 아현시장의 먹거리를 탐하게 된다. 다양한 맛으로 입과 속을 달랜 후 배불리 먹은 뒤 바로 인근에 자리 잡은 신촌로 웨딩거리로 나서 본다. 아현역에서 이대역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쇼 윈도우 너머로 웨딩드레스가 전시된 웨딩숍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거리 양쪽으로 많은 웨딩숍이 자리하고 있어 ‘아현 웨딩거리’로 불린다. 약 30년 전부터 형성된 이곳은 전국의 예식장과 웨딩숍들이 이곳에서 웨딩드레스를 구입하고 디자인을 본떠갈 정도로 웨딩드레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 아현 웨딩거리에서는 웨딩드레스의 최신 유행을 알 수 있었고, 저렴한 가격에 개성 있는 맞춤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의 필수 방문코스였던 이곳에는 100여 개의 웨딩드레스숍과 한복집, 사진 스튜디오, 메이크업숍 등이 즐비했다. 특히 꽃피는 춘삼월이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식장으로 떠나는 신부들의 행렬이 그 자체만으로도 봄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강남의 청담동 등지에 웨딩드레스숍들이 늘어나면서 경쟁력이 약해졌다. 현재 아현 웨딩거리는 위기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소상공인들이 모여 이대드레스협회를 만들어 코로나19로 결혼하지 못한 다문화 커플들에게 무료로 결혼식을 진행해주고, 시니어 모델을 대상으로 한복과 웨딩드레스 시상식 이벤트 등을 개최하며 아현 웨딩거리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아현 웨딩거리 소상공인들의 노력으로 다시 한번 이곳이 북적거리는 날들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추억의 맛을 찾아서
봄은 여자의 옷차림으로부터 온다고 했던가? 봄과 제일 가까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아현동 일대에 몰려 있는 대학가들이다. 먼저 이화여대로 향했다. 이대 앞에 왔으니 이곳에 안 들릴 수가 없다. 바로 40년 전통의 분식집 ‘가미’다. 1975년에 문을 연 가미는 가짓수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도록 이화여대 학생들과 이화거리 관광객, 쇼핑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맛집이다. 학교식당 메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옛 시절, 이화여대 학생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고 그 오랜 역사 덕분에 2대, 3대가 같이 다니는 집으로 유명한 이곳은 많은 이들의 추억과 기억이 얼기설기 얽혀 끊임없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발휘한다. 이곳의 메인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가미우동과 주먹밥이다. 일반 우동보다 조금 가는 면발은 밀가루에 소금만 넣어 두 번을 삶아냈고 국물에는 고춧가루와 달걀이 듬뿍 들어가 적당히 얼큰한 맛을 자랑한다. 주먹밥은 국산 찹쌀을 야무지게 뭉쳐 만들었는데 그 안에 양념한 한우다짐육을 넣어 한 끼 식사로 더없이 든든하다. 입안에 한가득 면발을 밀어 넣는 순간, 입안 가득 옛친구들과의 수다, 별것도 아닌 일에 뒤로 넘어가게 웃었던 젊음의 생기가 톡톡 터진다.

다시 예전 봄으로
내친김에 신촌까지 설렁설렁 걸어본다. 연세대로 향하는 차 없는 도로가 무거운 옷을 벗어던진 양 왠지 모를 해방감을 안겨준다. 이대 앞이 아기자기한 매력으로 넘친다면 이곳은 좀 더 스케일이 크고 역동적이다. 주말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가벼운 옷차림의 연인들,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솜씨 좋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자전거들, 카페에 앉아 통유리 밖으로 멍 때리는 사람들의 풍경이 자유롭고 온화하다. 거리 꽃가게가 화려한 봄꽃들을 깡통에 담아 잔뜩 내놓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수줍게 포장한 꽃을 들고 가는 남자의 마음에는 이미 봄이 한가득해 보이고 작은 꽃다발을 허리 굽혀 들여다보는 여자의 눈에는 살까 말까 하는 망설임과 감탄이 깃들어 있다. 돌아오는 길, 코로나19가 빼앗아 간 건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이 안타깝게 깃든다. 4월이 되고 5월이 오면 우리는 예전처럼 꽃놀이를 즐길 수 있을까? 하늘을 보이지 않도록 겹겹이 피어난 벚꽃 아래를 걸을 수 있을까? 봄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듯 사람들과 스치며 걸어다니는 건 또 가능할까?

봄을 찾아 나섰더니 더욱 봄이 그리워지는 시간. 부디 2022년의 봄이 예전 같기를 바라본다.


글 | 이경희_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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