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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두 번째 청춘이 머무는 독일마을

늦은 여름 어느 날, 우리는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하였다. 산비탈을 살짝 올라야 했고 주차 공간은 넓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다시’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했다는 것에 환호했다. 물론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도 아니거니와 네카강도 흐르지 않았다. 단지 독일의 지명을 가진 집이라는 것과 그 내부가 다소 독일 가옥을 닮았다는 것만으로 가족 모두는 행복했다.

 

독일에 젊음 바친 사람들,
남은 인생의 짐을 남해에 풀다

짐을 풀자마자 딸들은 브뤠첸과 메트부어스트독일식 빵과 소세지를 파는 곳을 찾아 다녔다. 바다를 둘러싸고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돌며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멸치회를 기대하는 어른들과 달리, 독일에서 태어났거나 가본 적이 있는 아이들은 거기에서 진짜 독일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 즐겨 먹던 매트부어스트 비슷할 것을 살 수 있었다. 마침 길 건너에 서 계신 독일아저씨에게 “구텐 아벤트!Guten Abend!”라고 인사를 드렸지만, 아저씨는 우리의 인사를 생각만큼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그 이유를 안다. 수십 년 동안 낯선 땅에서,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견뎌야 했던 한국인 부인이 여생을 자신의 고향에서 살 수 있도록 그는 이곳, 한국 독일마을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부인의 오랜 타향생활을 보듬어주기 위해 시도했을 그의 한국행은 자신의 삶의 뿌리를 끊어야 할 만큼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 분명하다. 마을의 외관이나 건축자재 등은 그가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결국 그에게 독일마을은 낯선 땅, 낯선 공기로 채워진 타향이다. 게다가 그곳은 실제 독일인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아니라 점차 관광지화 되어가고 있으니.

 

‘이주’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특히 1960년~70년대에 독일로 건너간 한인 이주노동자는 가족 동반이 불가했고, 가능한 한 젊어야 했으며 이주 초기에는 독일 사회와 분리된 채 병원이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당시 한인 이주노동자는 독일 사회가 필요로 했던 노동력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기에 인간으로서의 고뇌는 너무나 컸다. 3년이라는 예상된 고비를 넘기면서 독일 사회에 섞이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의 시간은 더욱 철저하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사회를 경험하고 낯섦과 다름을 감당하는 시간들이었다.

 

간호사나 광부로서 독일 이주노동은 한국 사회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삶을 털어내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자, 혹은 국가 차관을 얻기 위한 노예 계약이 아니었다. 이주자들의 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수준, 이주의 이유 등은 매우 다양했고, 차관에 대한 담보설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이미 역사 연구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바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자면 독일 광산의 고된 육체노동 분야나 돌봄 노동 분야의 노동력 부족은 한국의 외화부족 상황과 서로 맞물리는 조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주를 선택한 개인들에게는 국가의 경제적 계획 진행에 있어 외화가 부족한 실정이나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에너지를 희생해야겠다는 사고는, 애초에 동반되지 않았다.

 

당시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가 가난했으나 그런 가운데에도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대학까지 졸업했으나 적당한 직장을 찾지 못했던 이들, 가부장적인 한국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경험하고자 하는 진취적 기상을 가진 이들, 가난에 고생하는 가족을 돕는 동시에 자신의 공부도 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이들 등이 독일행을 택했음을, 이주자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독일이 내세웠던 ‘3년의 계약 이후 자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조건은 아주 먼 거리로의 여행을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고, 사람들을 추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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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일터, 이 악 문 삶
희생 아닌 희망을 꿈꾼 사람들

동양인의 몸에 맞지 않는 도구들과 한국에서의 의료적 처치가 아닌 환자들의 병원 생활을 돕는 독일적인 간호는 이주자들이 예상한 어려움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언어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청소 혹은 심부름이 대부분이었다. 간호학교를 나와 대기업의 보건소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은 1년 넘게 화장실 청소를 하며 세면기 앞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노동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한국에서 있었던 개인적 경험이나 지역적 차이로 벌어졌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고, 3년이라는 세월을 버텨 독일 사회에 정착해 나갔다.

 

족히 2~3000평은 될 정원과 미술관처럼 유리로 정갈하게 마감한 집에 나를 초대한 한 여성은, 직접 구운 먹음직스런 치즈케이크를 내어주며 자신을 공무원 아버지를 둔 대학 졸업자라고 소개했다. 독일인 의사와 결혼한 그녀는, 박사인 시부모님에게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서 별 수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독일 문화를 철저히 익히고, 자녀 교육에 공을 들였다. 또 부모님은 계셨으나 가난 때문에 보육원에서 자란 한 여성은 가정을 방문하며 노인들과 환자를 돌보는 고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집 정원 한쪽에 한국 배추, 상추, 호박, 쑥갓 등을 심어 먹으며 즐거움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 전체가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인 의사의 부인은 가난한 아시아 여성으로 폄하되지 않기 위해 지문이 사라지도록 가정을 정갈하게 유지했고, 채소를 심던 여성은 그것만으로 고향의 냄새를 충분히 얻지 못해 산으로 가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며 허전함을 달랜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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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주 쉽게 그들을 ‘국가 경제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찾아간 사람들이다. 단지 그들이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돈이 한국 경제에 보탬이 되었을 뿐이고, 그것은 희생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열심히 개척했던 노력의 결과이다.

 

다시 우리가 갔던 하이델베르그를 떠올린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팬션으로 운영되는 하이델베르그. 독일마을의 주택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 노후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독일과 닮은 마을을 조성했지만, 이미 50여년을 독일 땅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그들이 꿈꾸던 고향이 아니다. 그들이 온전히 한국인처럼 사고하고 대상을 사유할 수 없듯, 아무리 독일 자재로 집을 짓고 하이델베르그라 이름 지은 마을이라 해도 붉은 벽돌의 고성이 있는 하이델베르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과 독일 두 곳에 고향을 가진 이들이고, 스스로 그 길을 택한 이들이다. 더 이상 ‘희생자’라 부르지 말자.

 

글_ 나혜심 |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수석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 취득, 독일 지겐 대학교에서 19세기 독일 부르주아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주 문제와 세계사 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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