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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문화사 | 게임의 변천사

다방에서 스마트폰까지, 한국 게임의 문화사

처음 전자오락이 상륙한 1970년대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같은 디지털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이 50여 년의 처음과 끝을 마주 대어보면 도대체 어디가 같은 게임인가 싶을 정도로 디지털 게임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엄청난 변화를 보여 왔다. 이는 단지 게임 콘텐츠만의 변화에 머물지 않았다. 공을 튕겨 벽돌을 깨던 단순한 흑백 화면의 전자오락이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수백 명이 한 전장에서 싸우는 모습으로 바뀌는 동안 사람도, 인터페이스도, 환경도 함께 바뀌었다. 게임과 함께 변해온 사람과 공간, 플레이가 변해온 과정을 아울러 우리는 게임의 문화사라는 이름으로 엮어볼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 생산의 반대편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이어져온 디지털시대의 놀이문화가 어떤 길을 거쳐 왔는지 시기별 특징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오락실의 등장과 보편화 – 1980년대의 게임문화
1976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인 전자오락 ‘퐁Pong’은 동전이 가득 차 기계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대흥행을 일으켰다. 영화나 음악 등 다른 20세기 대중문화의 유입이 느렸던 한국에서 디지털 게임은 유례없이 빠른 유입을 보인 바 있었는데, 70년대 말 부산을 통해 일본의 디지털 게임기기들이 밀반입되면서부터였다. 오락실 같은 독립된 게임전문공간이 형성되기 이전이었기에 이때의 게임기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는 다방이나 목욕탕 같은 대중공간에서 간단한 시간 때우기용 오락 기계로 비치되었다. 지금의 40~50대들이 기억하는 게임공간으로는 이런 공간이 적지 않은 편이다. 생각보다 인기가 높았던 전자오락 기기들은 사업적 가능성을 보여주며 점차 규모를 확장해 나갔고, 80년대 초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전자오락실이라는 독립적인 공간이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초창기 오락실 게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게임들은 ‘갤러그’, ‘팩맨’, ‘스페이스 인베이더’, ‘브레이크아웃’ 같은 1세대 아케이드 게임들이었다. 동일한 스테이지가 단순 반복되는 간단한 구조였지만, 동전 투입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 시기의 결제방식에서 이들 게임은 자신의 실력만 좋으면 게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아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도 있는 방식이어서 동네마다 어마어마한 고수들이 한두 명씩 존재했고, 돈이 없는 아이들은 그런 고수들의 플레이를 구경하며 하루를 때우기도 했다.

가정용 PC와 콘솔을 통한 게임 시대
1988년에 한국 정부는 미래산업구조에의 대비를 위해 초등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을 의무화하기로 한다. 이 정책은 한참 경제발전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한국 가정에 교육이라는 목적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개인용 컴퓨터 보급 수요를 만들어냈는데, 당연하게도 오락실에서 게임의 재미를 맛본 아이들에게 컴퓨터는 전혀 교육용 의미가 아니었다. ‘게임이 되는 기계’는 교육의 탈을 쓰고 가정에 들어왔지만, 사실상 고급 게임기로 기능하기 시작하며 PC는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가정용 게임의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가정용 콘솔게임기 또한 유통되기 시작했다. 닌텐도의 ‘패미컴’이 세운상가 등에서 불법 개조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게임산업에 주목한 대기업들 또한 해외의 유명 게임기 라이선스를 가져와 ‘재믹스’, ‘겜보이’ 같은 국산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PC와 콘솔은 기존의 유일한 게임공간이었던 오락실에 비해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불량한 친구들이 적지 않고 요즘과는 달리 실내에서도 흡연이 가능해 늘 너구리굴이었던 오락실에 아이들이 가는 것을 부모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PC와 콘솔은 아이들은 안전한 집에 붙잡아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PC는 게임기라기보다는 교육용의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가정에서도 교육의 탈을 쓰고 접할 수 있는 기계로 활용된 바 있었다. 게이머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장점은 적지 않았는데, 가장 직접적으로는 게임비가 굳는다는 점이었다. 오락실에서는 판당 50원, 100원의 동전 소비가 필수적이었던 반면, PC와 콘솔은 기계와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있으면 추가비용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은 유소년기 게이머들에게 이는 적지 않은 메리트였다. 저작권 보호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80년대 분위기 속에서 게임 소프트웨어는 당연하게도 ‘공짜로 복사되는’ 무언가로 취급받았기에 가격에서의 메리트는 더욱 컸다. 이른바 ‘복사집’이라고 불리는 동네 PC가게에 디스켓을 들고 가면 장당 1,000원의 가격에 게임을 복사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가져온 게임은 또 동네 컴퓨터학원이나 친구들을 통해 무한정 복제되어 퍼져나갔다. 콘솔게임기의 롬팩 카트리지도 하나를 구입하면 롬팩 교환소에서 적은 비용을 내면 다른 게임으로 교체할 수 있어, PC와 콘솔게임은 오락실과는 또 다른 영역에서 게임플레이의 새 문화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IMF가 만든 새로운 가능성 – PC방,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1990년대 말에 이르면 거대한 경제적 충격이 한반도 전체를 흔들어놓는다. IMF 금융위기라는 사태는 게임문화 부분에서도 경천동지할 변화들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결과물이 PC방과 ‘스타크래프트’다.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온 퇴직자들은 자영업으로 전환하면서 PC방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열기 시작했고, 갑자기 취업길이 어두워진 많은 청춘은 저렴한 오락거리로 자리 잡은 PC방에 모여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동 시기인 1998년 출시된 ‘스타크래프트’는 이 모든 사태를 엮어내며 ‘스타 열풍’을 불러왔다. 안정적인 초고속인터넷망을 통해 편리하게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와 대전을 펼칠 수 있는 PC방은 저렴한 이용료와 더불어 집에서 혼자 하는 PC게임이 아닌,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면서 즐기는 새로운 대전형 게임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동전을 넣어야 자리에 앉을 수 있고, 게임오버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오락실과 달리 PC방은 시간제 요금으로 구성되었고, 자리를 차지하는 비용은 시간당 1,000원으로 굉장히 저렴한 축에 속했다. 여기에 후반부에는 여러 가지 먹거리까지 제공되면서 심야 정액제 요금을 끊고 새벽까지 컵라면을 먹어가며 ‘스타크래프트’에 매달리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임요환, 홍진호 등 지금까지도 이름을 떨치는 1세대 프로게이머들로부터 시작된 프로게이밍, e스포츠도 이 시기의 영향력이다. 온라인을 통해 모든 게이머가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네 최강, 지역 최강을 넘어 누가 한국 최강자인지를 가릴 수 있는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방송이 결합하면서 e스포츠라는 장르가 나타나며 21세기의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떠올랐다. 2002년에는 부산 광안리에서 열린 프로리그 결승전에 10만 관중이 운집하며 디지털 게임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PC방에서의 게임플레이는 한국 게임문화의 매우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외국인들이 한국에 여행 와서는 24시간 상설 운영되면서 요식업 허가까지 받아 앉은 자리에서 게임하며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주문해 먹을 수 있는 독특한 PC방 엔터테인먼트를 체험하며 놀라워하기까지 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뒤를 이어 온라인 대전게임의 왕좌를 차지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대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PC방에서 밤새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한 뒤 새벽에 ‘북창동순두부’로 해장을 하고 집에 간 추억을 이야기하며 자사 게임룸의 이름을 한글로 ‘피시방’이라고 써두는 등 한국 PC방 문화는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알려지는 추세다.

모두가 게임을 하는 시대가 왔다: 모바일 게임
2010년대 이후 본격화된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하며 디지털 게임 문화의 중심축은 다시 한번 옮겨갔는데, 바로 모바일 게임이다. 전 국민의 손에 한 대씩 들린 이 작은 컴퓨터는 이제는 생활필수품 수준의 보급률에 이르렀는데, 이는 게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성을 제공하는 기반이었다. 기존의 오락실, 가정용 게임기, PC방 등은 결국 게임을 위해 어딘가를 찾아가거나 별도의 비용지출을 해야만 플레이가 가능한 환경이었다. 디지털 게임이라는 놀이를 위해 따로 시간이나 비용을 쓴다는 것은 이때까지의 게임이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접근 가능한 무엇이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별도의 노력을 들여 게임을 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던, 충성도 높은 취미로서의 게임이 스마트폰 이전 시대의 게임들이었다. 스마트폰 대중화의 시대는 게임 분야에서 기존의 접근장벽을 크게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간단하게 앱스토어에서 터치 한 번이면 게임이 알아서 설치되었다. 따로 게임기를 살 필요도, 게임을 위한 시간을 낼 일도 없었다. 모바일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타난 이 간편한 게임 환경은 지하철 안의 풍경 속에 게임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만들어내며 게임의 새로운 대중화를 이끌었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집에서도 PC나 텔레비전 앞이 아니라 잠자리에 누워서도 게임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열린 것이다. 모두가 게임을 하는 모바일 게임 대중화 시대를 맞아 게임은 비로소 서브컬처라는 소수에 의해 전유되던 문화를 벗어나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했다. 게임하는 사람의 범주는 이제 여전히 하드코어한 게이밍을 추구하는 오리지널 게이머부터 일일연속극을 보면서도 짬짬이 눈과 손을 스마트폰에서 떼지 않으며 퍼즐을 맞추는 중년들까지 폭넓은 대상을 아우르게 되었다.

먼 훗날 한국의 민속문화로 남을 것 같은, 디지털 게임
‘스타크래프트’ 이래 해외 게이머들 사이에서 한국인은 ‘게임 잘하는 사람들’로 이야기된다. 아예 ‘스타크래프트’ 메인화면에는 한국 서버 입장 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고수들의 세계임을 안내하는 문구가 뜰 정도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스타크래프트’ 메인테마 음악은 ‘애국가 5절’로 불리며, 이런 분위기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사실상 한국 리그가 인구 규모와는 달리 세계 4대 리그 중에서도 1티어에 위치하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입된 지 반세기가 채 안 되는 짧은 역사 속에서 이토록 특정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게임에 집중하고, 또 심지어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유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은 해석이 나온다. 원래 게임을 잘하는 민족이었다는 민족주의적 해석도 있고, 워낙 다른 놀거리가 발달하지 못했던 강한 교육열의 환경에서 값싸고 재미있는 놀이로서 게임이 받아들여지며 성장했다는 사회적 해석도 눈에 띈다. 해석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전 세계 기준으로 봐도 디지털 게임 플레이는 이제 한국의 문화를 설명할 때 쉽게 뒤로 빼놓기 어려운 무언가가 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좀 더 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민속박물관의 한 코너에도 ‘한국의 전통문화 – 디지털 게임’ 섹션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은 나만 드는 것일까. 다방 구석에서 시작해 스마트폰까지 다채로운 환경에서 한국 디지털 게임은 매체 환경보다 더욱 다양한 플레이 문화들을 만들어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제는 한국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게임문화는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창발성을 가능케 한, 그럼으로써 세계 속에서 한국이라는 문화를 특징지을 수 있는 아이덴티티로 그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글 | 이경혁_게임칼럼니스트, 디지털 게임이 인간,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는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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