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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여름나기 용품

자연이 선물한 여름나기 용품

“세모시 옥색 치마”의 세모시는 열 새가 넘는 가는 모시풀로 길쌈한 고운 모시를 말한다. 하지만 요즈음 서천의 한산모시 공방에서도 열 새 베를 구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세모시 옷을 여름에 입는 것은 사치일까?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초복과 중복이 들어있는 칠월이 되면 이제까지 노출을 꺼려 매무새를 꼼꼼히 단속하던 사람들도 시원하고 통풍이 잘되는 간편한 차림새를 찾게 된다. 삼국시대부터 즐겨 입은 모시나 삼베는 살갗에 잘 붙지 않으며 인체와 의복 사이에 통풍 공간을 확보해 주므로 주로 여름철 옷감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또 혼례용 삼작 저고리의 가장 속에 받쳐입는 속적삼은 모시로 만들어 결혼생활에서 한평생 모시처럼 시원한 일만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여름을 나기 위해 제호탕1)이나 삼계탕 같은 음식을 먹고, 시원한 계곡 근처에서 탁족놀이를 하며 시를 읊는 풍류를 보여주었다. 등등걸이나 등토수를 착용함으로서 땀이 몸에 배지 않게 하는 슬기를 가졌으며, 계절에 맞는 옷감과 장신구를 어울리게 착용하는 멋을 아는 민족이었다. 이러한 여름나기 용품 중 재미있는 유물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땀이 배지 않는 속조끼, 등등거리
남성들의 평상복이었던 바지저고리는 여름용으로 삼베나 모시를 소재로 하였으며, 저고리 밑에는 등거리 적삼, 바지 밑에는 잠뱅이를 각각 밑받침 옷으로 입었다. 이 중 등거리 적삼은 여름에 땀이 저고리에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입었던 것으로, 삼베로 만들어 깃을 없애고 소매는 짧거나 거의 없는 형태로 하며 주머니를 달기도 하였다. 주로 여름에 모내기할 때는 등거리 하나만 입는데 땀을 잘 흡수하고 시원해서 입었으며, 농민들은 겉에 주머니를 달아 담배 등 소지품을 넣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등거리는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사진의 안동지역 삼베간이복처럼 지역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 입었다. 정월대보름에 등걸이를 해서 입으면 1년 동안 신수가 좋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다. 또 종이로 등거리를 만들어 저고리 속에 입었다가 대보름에 남몰래 불에 태우면 액을 면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입혔던 등거리를 벗겨 남몰래 달집 속에 감추어 두어 달집 태우기 할 때 함께 타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병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여름용 노동복인 등걸이를 불에 태움으로써 여름날의 더위도 함께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풍습으로 생각된다. 등등거리藤褙子는 등거리 적삼 밑에 입는 것으로 가는 대로 만들거나, 등나무의 가는 줄기를 구부려 성글게 엮어서 조끼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의 기록에 ‘등줄기를 엮어서 배자형으로 만들고 여름에 피부에 직접 닿게 입어 옷에 땀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준다. 또 말총으로 만든 것, 털을 넣어서 만든 것은 모두 고가의 진귀한 것이고, 서민들은 대나무나 담장이풀, 모시풀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등등거리 유물은 등줄기로 만든 것만 남아 있고, 말총이나 털을 넣어서 만든 것은 토수만 볼 수 있다. 이 등등거리와 함께 착용하는 것으로는 깃 형태로 만들어 목에 끼우는 것과, 저고리 소매의 손목 부분에 끼워 통풍이 잘되게 하여 소매에 땀이 배지 않게 하는 토수가 있다. 여름용 토수로는 가는 대로 만든 것, 말총으로 만든 것, 등나무 줄기를 엮어서 만든 것이 있다.

비옷으로 입는 도롱이. 겨울에는 이불로도 사용하다
도롱이는 각 지방별로 ‘도랭이·두랭이·둥구리·느역·도롱옷·드렁이·도링이·되렝이·되롱이’ 등의 사투리가 있고, 옛말로는 ‘되롱·누역’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세종실록』에는 사의蓑衣와 우롱雨籠이 자주 등장하고, 『숙종실록』에는 추운 겨울에 군사들이 이불 등의 방한구로도 이용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30여 건의 기사를 통해 사신선물용・하사품・국세용・권농・친경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롱이는 모초茅草나 그와 비슷한 풀, 볏짚·보릿짚·밀짚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안쪽은 재료를 촘촘하게 고루 잇달아 엮어 마치 뜨개질한 모양이 되고, 겉은 풀의 줄기가 아래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서 층층이 치마 같은 형태이다. 초가지붕에 빗물이 흘러내리듯이 비가 오면 빗물이 겉으로만 흘러내리고 안으로는 스며들지 않아 매우 과학적인 비옷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안에는 양쪽 팔을 끼울 수 있도록 끈을 달아서 마치 가운을 걸치는 것처럼 쉽게 걸칠 수 있게 하였다. 농촌에서는 비오는 날 외출을 하거나 들일을 할 때 어깨·허리에 걸쳐서 사용하였으며, 머리에는 삿갓을 써서 완전한 우장雨裝을 갖추었다. 강화지방에서는 남자들이 입는 도롱이를 ‘도롱’이라 하고, 여자용은 특히 ‘가장’이라고 하였는데 머리 위로 완전히 쓸 수 있게 하고 길이도 발목까지 오게 상당히 길었다. 1950년대까지도 시골에 가면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고무 비옷이나 비닐 비옷으로 대체되었다.

굽 달린 비신, 나막신
덴마크를 여행한 사람 중에는 예쁘게 채색한 나무신을 보면서 우리나라 나막신을 떠올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나막신은 풍속화나 흑백 사진에서 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남녀노소가 매우 즐겨 신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헌에는 우천雨天시 누구나 신는 신발로 되어 있다. 유물에는 아이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생일선물로 준 나막신, 신코에 무늬를 새겨 넣어서 만든 여성용 신, 굽이 다 닳아서 없어진 신 등 다양하다. 한자어로는 목극木屐·극·리극履屐·목혜木鞋 등의 기록이 나오며 옛날에는 ‘격지’라고 하였고, 근래에는 나무신의 와언訛言인 나막신으로 통칭되었다. 나막신을 언제부터 신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신장의 투르판 지역에서 출토된 나무신2)이 6~7세기 유물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시대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목극木屐은 시골의 청빈한 선비가 신는 것이며, 이미 이 밖에도 피혜皮鞋·마리麻履가 있었다. 목극을 착용하는 것은 우청雨晴·조습燥濕에 통행하는데 오래 견디고 헤어지지 않는 것을 취해서이며, 목극은 즉 리의 최고의 것이다. … 우리나라는 이 제가 있었으나 다만 초혜·피혜만을 신어 왔는데, 선조조 임진 전에 이것을 상하가 통착 한 바 있었다. … 그러나 천자賤者나 어린 자는 존귀한 사람 앞에서는 감히 착용할 수 없었다”라고 있어, 나막신이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있기는 하였으나 상하가 통용되기는 임진난 이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나막신은 나무를 구하기 쉬운 산간지방에서 주로 만들었으며,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배모양으로 만들고 앞뒤에 굽을 단다. 그래서 실제로 신어보면 매우 무겁고 불편하며, 또 걸을 때 소리가 나므로 귀한 자리에서는 신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물에서 보면 굽이 닳아서 없어진 것, 굽을 고쳐서 신은 것 등이 있어서 나막신을 꽤 즐겨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 빗길에나, 겨울철에도 발이 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덜 시려서 좋았다고 한다.

부채모양 모자, 갈모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우장雨裝으로 원래 이름은 갓모笠帽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실록에는 갓모에 관한 기록이 성종때부터 나오나 언제부터 썼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에 우모에 대한 기록이 있어, 조선 전기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갈모의 모양은, 펼치면 위는 뾰족하여 고깔 모양이 되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된다. 기름을 먹인 갈모지환지에 가는 대나무를 접는 칸살마다 살을 넣어 붙이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달아 만든다. 비가 올 때 우산처럼 펴서 갓 위에 덮어쓰고 중간쯤 안의 양쪽에 달린 실끈으로 턱에 매었는데, 갓 없이 쓸 때는 갈모테를 쓴 다음에 썼다. 그러나 사진이나 그림에서 보면 계절과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사용한 것 같다. 해가 내리 쬐이는 더운 여름날 양산처럼 쓴 것이고, 눈 내리는 겨울에 우산 대용으로 쓴 것 같다. 올 여름도 장마가 길어지고 습기가 많은 기후라는 예보가 있다. 목걸이형 선풍기, 아이스 목도리, 냉풍 조끼, 얼음 앞치마까지 개발하여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려고 애쓰는 현대인에게 등등거리 같은 친환경 재료로 만든 속조끼를 개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바람도 잘 통하고 겉옷도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서 좋은 등등거리 속조끼….

1) 제호탕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여름철 청량음료 중 최고로 여겼던 것으로, 오매육을 여러 한약재에 재워두었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것이다. 갈증이 해소되고 몸을 보신해주는 역할을 한다.
2) 안쪽에 직물을 붙이고 칠을 한 것으로 바닥에 굽은 없으나, 발등이 좀 넓은 형태임


글 | 최은수_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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