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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문화사 | 팬덤문화

팬덤(FANDOM) 문화의 변천

대중문화산업에는 언제나 스타와 팬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건국 후 연예계가 형성되자 곧바로 스타와 팬이 나타났다.

전쟁의 상흔이 어느 정도 복구된 1960년대에 한국 영화 전성기가 시작되는데, 바로 그때 등장한 국민스타가 신성일이었다. 신성일이 거리에 나타나면 팬들이 몰려들어 기마경찰이 충돌했다고 한다. 1965년 신성일과 엄앵란의 워커힐 호텔 결혼식엔 당시 워커힐 호텔로 가는 대중교통이 없고 자가용도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인데 3,400여 명이 운집했다.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접수대가 인파에 밀려 연못에 빠질 정도였다. 60년대 가요계에선 배호가 인기스타였다. 그가 29세 나이로 요절하자 장례식장에 소복 입은 여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즈음부터 남진, 나훈아의 시대가 전개되는데 팬덤 간의 대립이 격렬해 지역주의 양상까지 나타났다.

그랬던 팬덤fandom 1)이 조직화된 시기는 1980년대다.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로 신드롬syndrome을 일으킨 후 그의 노래에 괴성을 지르는 여성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팬클럽을 형성했다. 이들이 지르는 괴성에 놀란 기성세대는 이 팬덤에 ‘오빠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 이후 팬덤 문화는 가요계가 주도하게 된다. 당시는 해외 문화가 국내 콘텐츠 이상으로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어서 비틀즈, 듀란듀란, 진추하 등 해외스타들의 팬클럽도 나타났다. 팬클럽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수준은 아니었다.

케이팝 팬덤 문화의 출발점이 된 1990년대
보다 열광적이며 조직화된 팬덤이 나타난 것은 1990년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한국 댄스가수에 청소년들이 뜨겁게 반응했다. 이런 현상에 고무돼 SM엔터테인먼트가 청소년을 위한 아이돌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바로 HOT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의 등장으로 한국 가요계는 전면적 변화를 맞이했다. 이들에게서 오늘날 한류 케이팝 문화가 태동했는데, 팬덤 문화도 역시 이들에게서 비롯됐다. 특히 HOT 팬클럽이 거대한 전국적 조직을 갖춘 팬덤의 시초가 됐다. 같은 색의 옷과 풍선, 야광봉을 들고 스타를 응원하는 케이팝 팬덤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때 시작됐다. 이들은 PC통신이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스타를 옹호하는 담론을 형성했다. 스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대세력을 척결하는 공격성도 보여줬다. 우리 사회는 이들이 맹목적으로 ‘오빠’만을 추종하는 청소년들이라며 ‘빠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HOT 팬덤의 열광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은 다른 팬덤의 본보기가 됐고, 젝스키스 팬덤이 곧 HOT 팬덤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성장해 양강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한국 학교 곳곳에서 양 팬덤이 신경전을 벌였다. 공개방송은 언제든 양 팬덤이 충돌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199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공개방송 입장을 앞두고 벌어진, 흰색 우비를 입은 HOT 팬들과 노란색 우비를 입은 젝스키스 팬들의 격돌은 9시 뉴스가 소개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이런 식의 열광적인 팬덤은 동방신기 때 절정에 달했고, 엑소로 이어졌다. 동방신기 팬덤은 스타를 결사적으로, 정말 공격적으로 보호했다. 그래서 방송에서 동방신기에 대해 감히 불손한(?) 말을 할 수 없는 공포 분위기까지 생겼다. 이때까진 팬덤이 일부 극렬한 젊은 여성들의 오빠부대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팬덤 다변화
2007년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이 스타덤에 오르면서 ‘삼촌팬’들이 등장했다. 팬덤이 오빠부대라는 인식이 깨진 순간이다. 삼촌팬들이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은 기존의 청소년, 여성 중심 팬덤과는 다를 수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팬덤문화가 다변화됐다. 이때부터 30~40대가 ‘팬질’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돼 팬덤 연령대의 폭도 넓어졌다. 높은 연령대가 팬덤의 한 축이 되자 팬 활동의 규모가 달라졌다. 마음을 담은 소박한 선물 수준이 아니라 고가의 최신 전자제품부터 심지어 자동차까지 선물하는 등 씀씀이가 달라진 것이다.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팬덤에 편입되면서, 이들이 자신의 사회적 능력을 활용해 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들여다보는 사생팬이 되기도 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택시, 비행기 등을 타고 스타를 따라다녀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 문화도 생겨났다. 팬이 스타를 내세워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다. 처음엔 소박한 이야기였는데 점점 고도화되더니, 보이그룹 멤버들을 대상으로 성적인 상상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경향이 최근까지 이어져 올 초엔 19금 팬픽을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이 등장했다.

팬덤이 케이팝 열풍을 만든다
렬한 맹목성과 배타성, 사치스런 선물 등에 질타가 쏟아지면서 2010년 즈음부터 팬덤문화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젠 타 팬덤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다른 스타의 이름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스타 간의 비교도 금기가 됐다. 과거엔 좋아하는 스타가 아닌 가수가 무대에 올랐을 때 타가수 팬덤이 몸을 돌릴 정도로 노골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표현했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도 제고됐다. 스타에게 하는 고가의 선물은 자제하고, 대신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공공선을 실현하려 한다. 그래서 스타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쌀을 보내는 ‘쌀화환’이 보편화됐고, 각종 기부 문화도 활성화됐다. 환경을 생각해 숲을 조성하기도 한다. 무조건적인 옹호에서 벗어나 스타가 공공선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경우 비판에 나서기도 한다. 과거에 스타를 무조건 소유하려 했다면 이젠 스타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줘야 한다는 흐름도 생겼다. 그래서 연애 문제도, 과거 HOT 멤버와 열애설이 난 여성에게 피 묻은 편지, 면도칼, 협박 등이 가해졌지만 요즘엔 스타의 연애를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과거 팬덤이 수동적으로 지지해주는 역할이었다면 이젠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EXID의 ‘위 아래’를 팬들이 역주행시킨 것이 상징적 사건이다. ‘밈2)’으로 역주행 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디션 전성시대 이후 이제는 팬들이 스타를 ‘만든다’고 여기게 됐다. 음반사재기, 스트리밍 무한재생 등으로 시장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판도 받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음반과 음원시장이 활성화된 측면이 있고, 그런 자발적인 팬덤 활동을 통해서 스타가 생겨나는 시대가 됐다. 적극성과 경제력이 강화된 결과 최근엔 스타를 특정 회사의 광고모델로 만들어주기 위해 그 회사의 주식을 구입하는 팬덤도 나타났다.

 

국제화된 팬덤의 적극적 활동이 방탄소년단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도 탄생시켰다. 과거 JYP는 자력으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지금은 팬덤의 조력으로 저절로 해외진출이 이루어진다. 팬들이 가사를 모든 언어로 번역하고, 현지 방송에 신청하고, 현지 언론을 압박한다. 한국 스타의 사연도 다양한 언어로 가공해 공유한다. 팬덤의 연령대도 극적으로 확장됐다. 트로트 오디션 붐을 통해서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50~70대가 조직적인 팬 행동에 나섰다. 이들이 어린 팬덤의 문화를 순식간에 습득해 대중문화계 곳곳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임영웅 팬덤은 10억 원 이상 기부했고, 음원 1위를 만들고, 영상 클릭으로 유튜브 뮤직 핫이슈 1위를 만든다. 임영웅이 좋아하는 커피 상품 구매운동을 펼쳐 결국 임영웅을 해당 브랜드 광고모델로 만들었다. 각종 투표도 싹쓸이하다시피 했는데, 최근엔 아이돌차트 평점 랭킹에서 강다니엘을 제치고 임영웅을 1위로 만들었다. 김호중 팬덤은 김호중 입대 이후 발매된 김호중 앨범 2장을 백만 장 구매했다. 거액의 기부도 물론 이어졌다.

1960년대 전쟁의 상흔이 복구되면서 영화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팬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했다. 1980년대부터 조직화된 팬덤문화는 젊은층에서 시작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연령대로 그 폭이 확대되었고 활동의 영역도 확장되었다. 최근 트롯열풍과 함께 고연령층으로 확대된 팬덤이 트로트 전성시대를 만들고, 한류열풍을 타고 국제화된 팬덤이 케이팝 국제 신드롬을 만드는 형국이다. 인터넷 시대에 팬덤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될 전망이다. 다만 여전히 나타나는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팬덤문화는 반성이 필요하다.

1) 팬덤은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현상을 말한다.
2) 문화적 행동양식을 뜻하는 말로써 문화유전자나 행위 등이 유전자처럼 번식해 타인에게 복제됨을 뜻하는 것으로, 리처드 도킨슨 교수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이다.

글 | 하재근_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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