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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시루

시루, 정성과 염원을 담아내다

옛말에 ‘시루에 먼지가 쌓이고, 가마솥 물에 물고기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함을 시루와 가마솥에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시루와 솥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식생활을 꾸려 나가는 중요한 조리용구이다. 시루는 증기를 이용하여 곡물을 찌는 도구로, 쌀이나 잡곡 등을 가루 내어 찌는데, 증기가 곡물에 닿기 용이하도록 바닥에 구멍이 있다. 증기를 이용하여 조리하는 방식은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리 민족의 식생활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대부분의 곡물이 농경을 통해 얻어지고, 곡물을 음식으로 만들기 위한 조리용구도 자연스럽게 개발되었을 것이다. 곡물을 가루 내어 찌는 시루 또한 예외가 아니며, 농경생활과 더불어 시루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보면, 시루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나진 초도 패총과 기원전 5세기쯤 초기 철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진 북창군 대평리 유적에서 시루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시루는 한반도 북부지역에 편중되어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 시루는 한반도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북부지역에는 낙랑, 북창 대평리, 시중 노남리 등이 있다. 중부지역에는 포천 영송리, 파주 주월리, 가평 마장리 등이 있다. 남부지역으로는 완주 반교리, 전주 여의동, 남원 세전리, 군산 남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삼국시대 이후 시루가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시루는 증기를 이용하여 곡물을 찌는 조리용구이자 떡을 쪄서 시루 째 올려서 치성을 드리는 의례용구이기도 하다. 시루는 손잡이, 몸체, 바닥, 구멍으로 구성된다. 선사시대 시루는 평편한 바닥에 몸체로 올라가면서 넓어지며, 윗부분에서 점차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높이에 비해 입지름이 그리 넓지 않고 내부가 깊은 특징을 보인다. 손잡이는 쇠뿔 모양으로 몸체 윗부분 양쪽에 부착되어 있다. 바닥의 구멍은 원형만 취하는 형태, 원형·선형·타원형·삼각형·다각형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닥의 구멍이 원형인 것은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바닥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찔러서 뚫은 것으로, 구멍의 배치가 매우 조밀하고 불규칙하다. 복합형인 것은 바닥면 가운데에 상대적으로 큰 원형을 두고 그 주위로 선형·타원형 형태로 구멍을 냈다. 삼국시대 시루는 바닥에서 위로 이어지는 몸체가 구형이나 원형을 이루고, 입술 아래에 짧은 목이 있거나 생략되어 있다. 시루 바닥은 반구형의 뾰족한 형태로 중앙에 직사각형 구멍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손잡이는 몸체와 손잡이 사이에 손을 넣어 잡을 수 있는 반고리형이다.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시루는 입지름이 넓은 동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손잡이는 삼국시대의 시루와 같이 반고리형이다. 바닥의 구멍은 이전 시기의 시루보다 큰 원형이거나 큰 원형을 두고 주변에 삼각형, 직사각형, 다각형 등을 배치한 형태이다.

이상으로 시루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는 원형 또는 구형에서 동이형, 손잡이는 쇠뿔형에서 반고리형, 바닥의 구멍은 미세한 원형이나 복합형에서 상대적으로 큰 원형의 일정한 배치로 각각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시루를 만드는 소재는 토기시루, 질시루, 옹기시루 등 주로 흙을 주재료로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드물게는 금속으로 만든 청동시루·철시루 등이 있으며, 근현대에 등장한 양은으로 만든 시루도 있다. 시루는 증기를 이용하여 찌는 용도로 다양한 음식재료를 조리하는데 활용된다. 시루에 직접 열을 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조리 용구와 결합하여 사용한다. 물을 끓여서 증기를 일으킬 수 있는 별도의 용기가 필요한데, 이것을 ‘시루솥’이라고 한다. 시루솥은 선사시대에는 토기로, 삼국시대에는 이후에는 무쇠솥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루는 떡을 찌고 솥은 밥을 짓는 용구이다. 선사시대에는 잡곡을 가루 내어 시루에 찌는 형태인 떡이 주식이었다면, 삼국시대 이후에는 잡곡을 솥에 넣어 익히는 형태인 밥이 주식이었다. 주식이 밥으로 정착되면서 떡은 의례문화의 발달과 함께 일상식에서 비일상식인 별식 또는 의례음식으로 변화되었다.

찌는 떡은 우리 민족의 농경세시와 일생의례에서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의례음식이다. 세시풍속에서 살펴보면 느티떡, 송편, 팥시루떡 등이 있다. 느티떡은 사월 초파일에 즐겨먹는 음식이다. 이 무렵이면 느티나무에 새싹이 돋는데, 이를 채취하여 멥쌀가루와 섞어서 찐 설기떡을 만들어 향과 색을 즐기며 먹었다. 이 떡은 바쁜 농사철이지만 초파일을 맞아 휴식을 즐기며 기력을 재충전하기 위한 별식이다. 손으로 빚어서 찌는 형태의 송편은 추석 차례상에 진설하는 떡이다.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어서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농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팥시루떡은 시월 상달고사에 이용된다. 고사떡은 붉은 팥으로 고물을 하는데, 이는 붉은색이 악귀를 쫓는다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고사에 이용되는 시루떡은 시루째로 대문이나 장독대 등에 놓는데, 이를 ‘치성시루’라고 한다. 고사떡은 가내의 평안과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생의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찌는 떡으로 백설기, 봉치떡 등이 있다. 백설기는 삼칠일, 백일, 첫돌에 이용되는 의례음식이다. 멥쌀가루를 이용하여 시루에 찌는 떡으로 순백색의 떡이다. 백색은 재앙과 악귀를 막아주는 색으로 여겨졌다. 삼칠일의 백설기는 아이와 산모를 속세와 구별하여 산신의 보호 아래 둔다는 신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백일의 백설기는 아이가 희고 깨끗하게 자라라는 기원이 담겨져 있으며, 첫돌의 백설기는 신성함과 정결함을 의미한다. 봉치떡은 혼례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함을 보낼 때 이용되는 의례음식이다. 찹쌀가루와 붉은 팥을 이용하여 조리하는데, 찹쌀은 부부의 금실이 찰떡처럼 화목하라는 의미이며, 붉은 팥은 액을 피하고 잡귀의 범접을 막아내는 뜻이 담겨 있다. 이때 사용하는 시루는 붉은 판과 같은 의미에서 붉은 오지시루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봉치시루라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어 온 시루는 곡물을 찌는 조리용구이자 농경세시 및 일생의례에서 소망을 담아내는 의례용구이기도 하다. 농경세시에서 송편은 풍농을, 느티떡은 절식으로, 붉은팥시루떡은 제액초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생의례에서 백설기는 무병장수를, 오색송편은 학식과 덕성을, 봉치떡은 화목을 뜻한다. 이처럼 시루는 떡이라는 음식을 통하여 우리의 정성과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참고문헌
·오후배, 「우리나라 시루의 고고학적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김건수, 「주거지출토 토기의 기능에 관한 시론」, 『호남고고학보5』, 호남고고학회, 1997.
·지건길·안승모, 「한반도 선사시대 출토 곡류와 농구」, 『한국의 농경문화1』, 경기대학출판부, 198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속대관2』, 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3』, 1980.


글 | 장상교_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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