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는 ‘K-museums 공동기획전’
국립민속박물관은 ‘지역과 함께 하는 민속문화의 가치’ 구현을 목표로, 2005년부터 지역박물관과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고 지역박물관의 역량을 강화하여 지역민의 문화 향유기회를 확대하고자 민속생활사박물관 협력망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2012년부터 시작된 ‘K-museums 공동기획전’은 국립민속박물관이 공·사립·대학박물관과 협력하여 전시기획·디자인·홍보 등을 공동 진행하는 사업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미 개최했던 전시 콘텐츠를 활용하거나 지역 문화 콘텐츠를 토대로 지역성을 살린 특별전시 주제를 발굴함으로써, 지역박물관의 자생력을 높이고 지역민의 문화 향유권 확대 등 지역 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협력기관과의 긴밀한 전시협업으로 인력·예산이 열악한 지역박물관 학예인력의 전문성 향상과 지역박물관 기능 활성화도 꾀하고 있다.
‘K-museums 공동기획전’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보령석탄박물관’ 등 총 50개 박물관과의 상호 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올해에는 경기도 여주박물관과 부평역사박물관 등 2개 박물관이 협력기관으로 공동기획전을 한창 준비하고 있다. 전시 시공전시 그래픽 포함, 홍보물도록 포함 제작, 유물사진 촬영 및 전시 영상 제작, 원고 번역료, 전시준비 및 운영 보조인력 지원1인, 4개월 등 전시 관련 예산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직접 집행한다.
‘K-museums 공동기획전’은 매년 10월 전후 사업공고를 내고 공모기관의 전시기획안에 대한 심사를 거쳐 협력기관을 선정한다. 매년 11월 협력기관 워크숍에서 그해 공동기획전 운영사례를 공유하는 한편, 이듬해 협력기관의 전시기획안 발표와 토의를 거친다. 이를 시작으로 협력기관은 전시기획안 작성, 자료 선정, 전시기본 디자인, 전시 시공 및 현장작업, 전시개막 등 모든 과정에서 국립민속박물관과 협업이 이루어진다.
소통과 협력으로 다져진 공동기획전, 《여주, 영릉을 품다》
여주박물관과의 공동기획전 역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논의들이 오고 간 끝에, 코로나19 사태로 준비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주, 영릉을 품다》2020. 10. 12.~12. 13. 전시개막을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 여주지역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릉세종 英陵, 효종 寧陵을 주제로 개최된다. 현재 여주에는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 등 두 기의 조선 왕릉이 있다. 두 왕릉은 여주로 오게 된 시점도 다르고 능호陵號도 다르지만, 우연히 한글 발음이 ‘영릉’으로 같다. 조선 시대의 왕릉은 단순히 국왕 개인의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왕릉이 자리한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왕릉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두 영릉이 여주에 자리하면서 여주의 역사와 여주사람들의 삶에 미친 변화를 조명한다.
영릉이 여주에 자리한 이유
1부 ‘영릉, 여주에 오다’에서는 왕릉이 여주로 오게 된 과정과 그에 따른 변화를 살펴본다. 두 영릉이 위치한 북성산北城山은 풍수지리상으로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지는 형세로서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남한강을 끼고 있는 여주는 일찍부터 한양과 중부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수운水運의 중심지이면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로漕運路로서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용이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두 영릉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영릉이 자리한 이후 원래 ‘여흥도호부驪興都護府’였던 여주는 1469년 목牧으로 승격되어 ‘여주목驪州牧’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여주驪州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조선 시대 왕들은 선왕先王들의 무덤을 살피고 참배하기 위해 직접 여주로 행차하였다능행陵幸. 한양에서 여주까지 가는 동안 각 지역의 농사를 살피고 백성들의 고충도 들어주었다. 1779년 여주에 능행을 온 정조는 남한강변에서 효종을 그리워했던 송시열의 이야기에 크게 감명을 받고 그를 기리는 사당의 건립을 명했으며, 1785년 ‘대로사大老祠’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여주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온 영릉
2부 ‘여주, 영릉과 함께하다’에서는 여주사람들의 삶에 자리한 두 왕릉의 의미를 보여준다. 여주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영릉과 함께하면서, 왕릉을 모신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세금감면과 같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왕릉이 여주사람들에게 항상 혜택을 준 것은 아니었다. 왕릉이 옮겨오자 그곳에 있던 묘를 강제로 이장해야 했고,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의 오랜 생활 터전도 옮겨야 했다. 또한 인근 백성들은 움푹 패인 곳을 흙으로 채워 메우는 보토補土작업과 같은 부역에 자주 동원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영릉에서의 행사나 주변 환경 정비에 주민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영릉 성역화사업 이후 영릉은 여주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지로 탈바꿈하면서 지역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영릉은 관광지의 의미를 넘어 지역을 상징하는 얼굴로써 활용되고 있다. ‘세종’과 ‘영릉’을 앞세운 상호, ‘여주대왕님표쌀’, ‘세종대왕릉역’, ‘한글시장’ 등이 그 예다. 한편 여주사람들에게 영릉은 왕릉이라는 엄숙한 공간이 아니라 나들이 장소이자 추억의 공간이 되었다. 영릉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진들에서는 여주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은 영릉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글 | 구문회_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