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탈 수 없던 초헌
조선시대의 지위 높은 사람을 일컫는 표현으로 헌면軒冕이라는 말이 있다. 초헌軺軒과 면류관冕旒冠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인데, 여기서 초헌은 사람이 올라타도록 제작된 외바퀴 수레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탈 것 중 가장 독특한 생김새를 가졌다 해도 좋을 초헌은 이품二品 이상의 벼슬아치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상징물로 여겨졌다.1) 초헌은 명거命車, 목마木馬, 초거軺車, 헌초軒軺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초헌은 그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초헌은 형태와 부속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어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초헌은 대체로 상단부의 의자와 앞뒤로 길게 뻗은 들채, 아래로 뻗은 두 기둥과 기둥 끝에 고정된 바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비슷한 크기겠지만, 국립민속박물관의 것은 바퀴를 포함한 높이가 169cm이고, 들채의 길이가 375cm여서 앞뒤로 상당히 긴 형태이다. 의자에는 두께감이 있는 가죽 방석을 얹어 승차감에 신경을 쓴 모습이고, 목제 등받이 뒷면에는 당초문양唐草文樣을 양각하였으며, 그 주변은 운각雲刻으로, 의자 바닥의 옆 판재에는 안상문眼象文을 장식하였다. 바퀴에는 철판을 씌워 내구성을 높이고 각 부분을 고정하는데도 정교한 장석을 사용하여 누가 보더라도 ‘고급지다’라고 할 만 하다.
바퀴달린 가마라니!
초헌은 인근 국가 어디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자 개발 승용 수레로,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명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은 수레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왕이었는데, 특히 중국의 손수레를 조선 땅에 맞도록 개량한 강주杠輈를 백성들에게 보급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세종 15년1433 강주국杠輈局이라는 관아까지 설치하였지만 실효를 보지는 못하였다. 제대로 된 바퀴의 개발도 녹록치 않았을 뿐더러 국가에서 수레를 만들어 보급한다 해도 일반 백성들이 이를 수리해가며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름 첨단의 기술인지라 명明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상당히 후대 인물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도 자신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 거제車制편에서 여전히 수레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종 이후로도 오랫동안 손수레의 보급은 요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의 상황에서도 세종의 수레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고 결을 달리하여 발휘되었으니, 그 결과물이 바로 초헌이다. 세종 22년1440 3월에 세종은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강주와 비슷한 형태의 탈 것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이것을 재상들이 사용하게 하고자 하였다.2)
이후, 한 달 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초헌의 초기 모델 두 대를 각각 영의정領議政 황희黃喜, 1363~1452 와 우의정右議政 신개申槪, 1374~1446에게 하사하는데, 이후로 이품 이상의 대신들에게는 초헌을 지급하여 이를 타고 다니게 하였다.3) 당시 반가에서 주로 이용하던 탈 것은 남여籃輿나 교자轎子 등의 가마로, 가마꾼이 직접 들고 이동하는 형태였다. 때문에 바퀴가 달린 초헌은 말 그대로 전에 없던 신문물이었다. 고관의 신분임을 새삼 깨닫게 해 줄 정도로 사람 키 높이보다 높게 앉아있는 기분, 바퀴가 굴러가면서 느끼게 되는 상대적인 속도감은 매우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개량형 초헌-최초의 컨버터블Convertible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자에게는 초헌과 함께 일산日傘; 蓋이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햇볕이 강하거나 빗발이 날리는 경우, 초헌에는 지붕이 없는 연유로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설치·철거가 간단한 지붕을 얹은 개량형 초헌의 제작을 건의하게 된다. 초헌 상단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상단에 덮개方蓋를 설치하고, 푸른 면포木綿를 늘어뜨리는 한편, 기둥 주변에 판자로 난간을 만들고 푸른색의 천을 두르는 형태였다. 단, 채색은 단조롭게 하고 따로 그림을 그리지 않게 하여 분에 넘치는 화려함이 없도록 하였다.4) 아쉽게도 오늘날까지 보존된 개량형 초헌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 형태나 만듦새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초헌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 중에는 초헌 자체의 개량화도 있었지만, 가옥 대문 형태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반가班家의 외행랑에 연이은 대문은 ‘솟을대문’이라 하여 가마를 탄 채로 지나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담장이나 행랑채보다 높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헌을 타게 되면서 솟을대문의 높이가 더 높아지고 바퀴가 지나갈 수 있도록 턱을 없애는 경우도 생겨났다. 또는, 낙선재樂善齋의 장락문長樂門처럼 초헌의 바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문턱에 요凹자 형태로 홈을 파기도 하였다.
생각보다 낮은 가성비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모양,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좌석의 높이, 첨단 철제 바퀴 등 다양한 특징으로 조선 노블리스의 상징이 된 초헌이었지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조 18년1742 10월, 협소한 한양 도성의 골목과 초헌의 높이 때문에 벌어진 사건 하나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재상 한명이 초헌을 타고 다니기에 길목이 복잡하고 담장 밖으로 튀어나온 처마가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남의 집 지붕 서까래를 잘라버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가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신하인 연신筵臣을 통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임금인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이를 용서치 않고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해당 재상을 파직시켰다는 내용이다.5) 그 재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18세기 후반의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역시 초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자신의 저서 『북학의北學議』를 통해 그는 ‘초헌은 바퀴가 작으면서도 수레 높이는 한 장丈이나 되니, 사다리로 지붕에 오른 듯하여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초헌이 움직일 때도 다섯 사람이나 필요한데, 수레란 자고로 한 대에 다섯을 태우려고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을 태우고 다섯이 걷자고 만든 것이 아니다’6)라고 그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고종 31년1894에 와서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예산안과 규정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고위 관직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평교자平轎子와 초헌이 영구히 폐지7)되어 이후로 더 이상 제작하거나 활용되지 않았다.
수레 대신 탄생한 초헌. 수레제작의 핵심 기술이 아낌없이 투여된, 목적이 다소 애매하지만 나름 늘씬하게 뻗은 이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에 빠져들게 한다. 세종은 수레의 보급을 통해 백성들의 일상과 생업에 편리함을 주고자 노력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수레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조정 신료들의 비협조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쩌면 세종은 그들을 말로 설득하는 대신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수레 형태의 탈 것에 대신들을 직접 오르게 하여 수레가 가진 효용성과 편리함을 몸으로 느껴보게 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특하고 멋진 탈 것에 올라 한껏 좋아하는 신료들을 보며 “너희들이 좋다고 타고 있는 그것이 바로 수레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세종의 뜻을 담아 수레 제작을 주관하던 강주국도 세종 25년1443 조운漕運8)을 운영하는 전운색轉運色이라는 관청으로 바뀌는 등 그의 수레 보급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박물관에 남겨진 초헌을 보며, 수레 보급 의지에 담긴 애민愛民과 그 때문에 더 컸을 아쉬움에 마음을 얹어본다.
참고문헌
·『경국대전주해』
·『조선왕조실록』
·대양서적 출판부, 『한국명저대전집-경도잡지』 대양서적, 1972.
·문화재관리국, 『궁중유물도록』, 1986.
·박제가, 박정주 역, 『북학의』 서해문집, 2003.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조선왕조유물도록』, 19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1)『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후집後集 예전禮典 춘관春官 종백宗伯 의장儀章 조條 초헌軺軒
2)『세종실록世宗實錄』 권卷88 (세종 22년 3월 23일) 命尙衣院造軺軒, 蓋欲使宰輔乘軺軒也.
3)『세종실록世宗實錄』 권卷88 (세종 22년 4월 3일) 賜領議政黃喜, 右議政申槪軺軒, 仍傳旨禮曹 自今二品以上, 許令乘軺軒.
4) 『세종실록世宗實錄』 권卷92 (세종 23년 1월 15일) 軺軒左右, 各樹二柱, 上設方蓋, 用靑木緜, 狀如有屋轎子, 柱下橫木爲欄. 又用薄板, 塡塞空處, 四面垂綠色簾. 柱漆以交墨朱土; 薄板, 漆以靛靑, 不施繪畫, 務要儉素, 庶爲便益.
5) 『영조실록英祖實錄』 권卷56 (영조 18년 10월 10일) “俄聞筵臣言, 有 ‘一宰臣, 嫌其路逕甚窄, 不容軒軺, 鉅斷閭家屋椽’ 云. 請令京兆査出, 罷職.” 依啓.
6) 박제가, 박정주 역, 『북학의』 서해문집, 2003, p.39.
7) 『고종실록高宗實錄』 권卷32 (고종 31년 7월 2일) 大小官員公私行, 或乘或步, 任便無礙, 平轎子, 軺軒, 永廢. 無論公私出入, 宰官扶腋之例, 永廢, 老病不堪人, 不在此例.
8) 조세로 걷어들인 곡물등을 운송하는 제도
글 | 김창호_국립민속박물관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