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는 2019년 두 차례에 걸쳐 총 28점이 수집되었다. 1차로 수집된 자료는 총 16점으로 각각 8점씩 나누어 2개의 화첩으로 보관 중이었다. 그러나 화첩의 형태로는 전시를 하는데 제약이 있기에 화첩에서 각 화면을 분리하고 보존처리 후 소장중이다. 2차로 수집된 풍속화는 12점으로 모두 액자에 들어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액자들은 모두 보존처리를 완료하였다. 기산 풍속화는 화폭이 대략 가로 36cm, 세로 26cm이며 비단에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화가인 기산 김준근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인물이다. 국내기록에서 그에 대한 자료나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에 그가 활동했던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그의 그림을 구입했거나 접해보았던 외국인들의 저서를 통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외국의 기록과 국내 연구진의 조사를 통해서 유추해본 기산 김준근은 강원도 원산 출신의 화가로서 출생년도는 1860년 전후로 추정되며, 체계적인 그림공부를 한 적은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고 세간에서는 ‘병풍집 할바이’로 불릴 정도로 병풍그림을 잘 그려서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1) 그의 그림이 유통되던 지역은 원산, 제물포, 초량과 같은 개항지였으며, 이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조선의 풍속화를 주문받아 판매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개항지를 통해 조선에 방문한 외국인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풍속화를 비롯한 조선의 특산품과 민속품 등을 수집하였다. 개인의 연구서나 여행기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거나 선물을 위해서 자료를 수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된 목적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민속을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당시 서구의 영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편전쟁 승리 후 동아시아에 대한 경제적인 이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동시에 각 나라의 문화, 풍속 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각종 학회가 조직되었으며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민속을 연구하는 민족학의 발전과 더불어 민족학 박물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민족학 박물관의 유물 수집은 탐사, 구입 등 학술적, 상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수집품은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는 작품이 아니라 각 민족의 풍속과 종교, 사회생활을 보여주는 물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풍속화는 수집된 자료의 사용법이나 복식의 경우 착용하는 방법 등의 이해를 돕고 타국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도구였다. 더욱이 그 나라의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풍속화는 자신들이 그리는 그림보다 더욱더 사실적이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아 인기가 많은 수집 품목이었다.
대략 1,500점 정도로 파악된 기산 풍속화는 대부분 구미歐美지역 박물관 및 미술관에 분포되어 있으며, 윌리엄 칼스William Carles의 ‘Life in Corea’, 캡틴 카벤디쉬Captain Cavendish의 ‘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의 ‘Korean Games’, 샤를 바라Charles Varat의 ‘Le Tour du Monde’ 와 같은 서양인의 조선 여행기에도 김준근의 풍속화가 삽화로 실릴 정도로 실력 있는 풍속화가로서 자리 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화원도 아니었던 그의 그림이 서양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기산풍속화는 배경이 없이 인물과 주제에 맞는 행위, 소품만이 등장하며 선묘로 간략하게 표현되고, 우상단에 화제畫題를 적어 넣은 양식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2) 기산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은 신체에 비해 얼굴을 크게 그려 비율이 맞지 않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마가 넓고, 하관은 좁고 각이 져 있으며 눈은 가느다랗고 길며 치켜 올려져 있다. 또한 기산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을 때나 고문을 받고 있을 때도 생기 없는 무표정과 경직된 자세로 일관하고 있으며,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표정하고 경직된 모습의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등장인물들과 다르게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말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에서부터 나타난 논갈이, 씨름, 서당, 빨래터, 대장간, 신행, 벼타작, 자리짜기, 편자박기 등의 소재는 기산풍속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지만, 기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전 시대 풍속화가들의 답습이 아니라 급변하는 19세기 말 사회의 시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내용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수공으로 물건을 제작하는 장면, 물건을 파는 장면 등은 종류가 확대되었고, 장례, 제사, 형벌과 같은 장면은 많지는 않지만,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소재였다.
풍속화로서의 주제가 다양화되고 확대된 것은 19세기 말 개항기의 변화하는 조선의 모습을 작가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도 있겠지만,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을 여행하며 이국인異國人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인상 깊고 진기했던 모습, 혹은 조선의 전근대적인 사회상을 보여줌으로써 자국 문화의 우월성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한 주문을 했던 서양인들의 요구 또한 기산풍속도의 주제 확대에 큰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용으로 소비되고 감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풍속화에 종교의식, 제례, 상례, 형벌을 받는 내용의 그림을 그리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산 김준근은 시대의 변화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활용할 줄 알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국인들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김준근에게 그림을 주문하였던 간에, 현재의 우리는 기산 풍속화를 통해 다양한 19세기 말 조선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조선사람들의 세세한 일상의 모습, 직업, 복식, 계층의 구분, 일생의례, 무속, 놀이의 종류, 생활 도구의 생산과정, 형벌 등을 아우르는 기산 풍속화는 당시의 생활사를 담고 있는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로서 국립민속박물관에 알맞은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기산풍속화는 현재 기획전시실1에서 전시중인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 특별전시에서 볼 수 있다.
1) 김수영, 「수출회화로서 기산 김준근 풍속화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2007, pp.58~59.
2) 이러한 특징을 토대로 19세기 중국 풍속화의 한 형태인 닝보(寧波)수출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 김수영, 「수출회화로서 기산 김준근 풍속화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신미영, 「箕山 金俊根 繪畵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정병모, 「箕山 金俊根 風俗畵의 國際性과 傳統性」, 강좌미술사, 26호, 2006, pp.965~988.
· 정형호, 「기산 김준근 풍속화에 나타난 민속적 특징」, 중앙민속학, 13호, 2008, pp.179~224.
글 | 전형근_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