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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 여름, 매운 음식의 향연

매운맛의 마력과 함정 사이에서

매운맛의 포텐Poten
오래전 일이다. 지인과 함께 기막히다는 목포의 홍어 횟집을 찾았다.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기도 전에 스멀스멀 숙성된 암모니아의 톡 쏘는 그윽함이 내 코에 닿았다. ‘음, 괜찮은 녀석이겠군’ 살포시 날개 부위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음! 음~ 음.” 뒷골로 고속도로가 뚫린 듯 짜릿하고 얼얼했다. “아따, 거시기 겁나게 찡하네” 순간 지인이 내뱉은 말에 일행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번 뚫린 도로를 마다할 리 없듯이 그날 우리는 목포 막걸리를 친구삼아 홍어회의 모든 부위를 신나게 섭렵했다.

남도 잔칫상에 주인공인 홍어회는 마니아들에겐 짜릿한 맛의 찬사가 쏟아지는 음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짜릿한 맛이란 단맛, 신맛, 짠맛, 쓴맛과 같이 혀의 미뢰 기관을 통해 느끼는 기본적인 네 가지 맛과는 다른 통각의 맛을 의미한다. 즉 유쾌한 자극과 즐거운 통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통각의 맛은 좋음의 단계를 지나면 중독으로 탈바꿈한다.

통각의 맛의 대표주자는 역시 매운맛이다. 통각의 맛은 입속 점막과 입안 전체의 자극을 유발함으로써 강렬한 느낌을 촉발한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적당하고 유쾌한 매운맛은 화끈한 얼얼함으로 시작해서 강렬한 뒷맛을 남긴다. 매운맛을 찾는 심리는 불볕더위에 불가마에서 느끼는 짜릿한 시원함과 비슷하다.

매운맛과 입맛의 변화
기상청에 의하면 작년보다 올여름이 엄청난 찜통더위라고 한다. 한여름이면 사람들은 무더위를 식히고자 시원한 냉면이나 찬 메밀국수, 냉장 수박이나 얼얼한 빙수를 찾는다. 하지만 한편에선 이열치열 효과를 보려는지 땀엔 땀, 열엔 열로 응수하는 맛 사냥꾼들도 있다. 특히 강렬한 매운맛을 자랑하는 유명 음식점들은 더울수록 북새통이다. 사실 매운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추세가 높아지고 있다.

알려진 바대로 매운맛을 내는 여러 향신료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추는 기원전 8000∼7000년쯤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재배되었다. 이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향신료에 관심이 많았던 상인들에 의해 고추는 본격적으로 유럽에 알려졌고 다시 아프리카, 인도, 남아시아, 중국까지 전해졌다.
야모모토 노리오는 『페퍼로드』에서 ‘고추가 일으킨 식탁 혁명’이라는 상징적인 말로 매운맛이 세계인의 입맛을 어떻게 장악했는지 명증하게 설명한다. 그야말로 세계인의 식탁은 고추를 알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큼 매운맛은 인간의 입맛 변화를 견인했다.

한국의 경우 1614년 간행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고추는 일본에서 유입됐다. 그러나 고추에 독이 들었다는 소문 때문인지, 고추의 효능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탓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고추의 상용화는 100년이 지난 1766년 『증보산림경제』에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다”는 기록에 의해 많은 이들이 매운맛을 익숙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연구 자료에 의하면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이 어패류의 지방 산패 방지에 효과가 있으며, 어류, 육류의 비린내를 잡아주는 좋은 감미료라는 사실을 확인되면서 매운맛에 대한 선호와 신뢰가 깊어진 듯하다. 맛과 믿음을 동시에 거머쥔 고추의 위세는 각종 다양한 식재료에 활용되면서 한국요리의 중요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특히 고려 시대 몽골로부터 유입된 육류 요리는 산초, 생강, 마늘, 후추, 겨자를 사용해 요리했지만, 고추가 소개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육류 요리에 고추를 가미했고, 나아가 고추를 이용한 다양한 레시피가 나왔다.

매운맛의 광풍을 넘어
최근 들어 한국은 매운맛 열풍이다. 매운 불닭, 매운 짬뽕, 맵고 싸한 마라탕, 더 매운 매운탕, 매운 떡볶이, 불닭꼬치, 불족발까지 그야말로 매운맛 전성시대다. 이름도 맵고 맛은 더더욱 맵다. “뭘 그렇게 매운 걸 먹어”로 시작했다가, “역시 매워야 정답이야”로 끝난다. 처음엔 땀을 흘리고 신음도 내지만 어느새 젓가락은 매운 음식을 향해 출격한다. 손가락에 묻은 닭발의 매운 양념을 아쉬워하며 쪽쪽 빨거나, 마라탕 국물의 밑바닥이 드러나면 마치 한바탕 흡족한 식탁 전투를 치른 듯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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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매운 음식들

 

요리사의 관점에서 볼 때 강렬한 매운맛은 위장 활동을 촉진해서 식욕을 증가시키고, 풍미 증진, 스트레스 해소, 체내 지방 분해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영양학적으로도 고추는 비타민 A,C,E가 풍부하여 항산화 작용도 탁월하다. 무엇보다 캡사이신은 진통 작용을 하는 엔도르핀을 뇌에서 분비시켜 피로와 아픔을 완화하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런 영양학적 작용이 아니더라도 성과와 경쟁에 시달리고, 각종 스트레스에 짓눌린 현대인이 매운맛을 추구하는 심리도 이해가 간다. 특히 현대인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주 매운맛을 찾는다고 한다. 누적된 피로를 음식 쾌락으로 풀려는 잠재된 욕망의 반영일 수도 있다. 짧지만 강렬한 매운맛을 찾는 것은 어쩌면 과중한 스트레스를 즐거운 자극으로 대체하려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삶의 작은 쾌락들이 알고 보면 소소한 자극들의 연속인 것처럼 통각의 샘을 흔드는 맛의 세계도 멋진 유혹임은 분명하다.

궁극의 매운맛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운맛을 더욱 매운맛the more spicy으로 끝없이 채울 순 없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처럼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리면 좋겠다. 지나치게 매운 음식에 대한 집착과 광풍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음식이 매운맛으로 채워지면 그것은 더는 매운맛이 아닐 것이다. 자극을 덮을 더한 자극을 찾을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매운맛에 비견할 행복한 맛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


글 | 유재덕_독서주방 저자.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조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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