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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는

여성 해방의 축제, 화전놀이

겨우내 움츠렸던 여린 가지가 마침내 제 몸을 기꺼이 열어젖히며 꽃망울을 내밀고 그리하여 처처의 꽃망울들이 진홍의 참꽃잎을 폭죽처럼 터뜨릴 때, 대지의 딸들은 무리를 지어 산을 찾고 그 꽃잎을 한 움큼씩 따서 제 입에 넣는다. 자신을 가둔 겨울로부터 해방된 꽃잎과 집으로부터 해방된 여성의 일치. 참꽃잎을 머금은 여성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화전놀이를 통해 오롯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피어난다.

신라 성덕왕 시절, 남편인 순정공純貞公 일행과 강릉으로 가던 수로부인水路夫人은 천길 절벽 위에 만발한 철쭉꽃을 갖고 싶었다. 함께 길을 떠난 어떤 이도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홀연히 나타난 이름 모를 남성이 기꺼이 절벽에 올라 꽃을 꺾어 바치며 헌화가獻花歌라는 노래까지 곁들였다. 자신의 삶터인 경주를 떠나 남편의 임지인 강릉으로 가는 길. 수로는 낯선 남성의 호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으로 표상되는 일상의 구속을 일정하게 벗어난다. 그로부터 이틀 뒤 임해정臨海亭에서 수로는 마침내 남편의 품을 완전하게 떠나 용과 함께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일상으로부터 분리와 비일상의 체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수로는 바다 속의 경험을 “일곱 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깨끗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옷에는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향기가 남아 있다. 수로의 이야기에는 봄과 꽃, 그리고 집을 떠난 여성의 비일상적 체험이라는 화전놀이의 기본요소가 들어 있다.

경주에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꽃을 꺾은 고개, 신라 때에 궁인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재매곡財買谷이란 골짜기도 있었다.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청연靑淵의 위에 있는 골짜기上谷에 묻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다. 매년 봄,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가득한 때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열었으며, 그 입구에 초막을 하나 얽고 송화방松花房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이미 신라시대에 모습을 갖춘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 전기에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진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집안의 여성들, 특히 며느리들이 함께 모여 놀기 위해 장막을 설치하고 참꽃으로 지짐을 구워 먹으며 질펀한 음주와 가무악을 즐겼으니, 이때의 봄나들이는 신라의 화전놀이는 물론 후대의 화전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화전놀이가 여성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16세기의 시인 임제林悌, 1549~1587는 참으로 맛깔스런 시 한편을 남겼다.

작은 개울가에 돌 고여 솥뚜껑 걸고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을 지졌네.
젓가락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한 해 봄빛이 뱃속에 전해지네.

– 홍만종, 『순오지旬五志』

남성들도 낭만적인 화전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부정기적인 봄맞이 풍류의 일환이었으며 참여 범위도 지인들로 제한되어 여성들의 화전놀이와 구별된다. 또한 문화적 의미도 남성들에게는 가벼운 여가활동이었으나, 여성들에게는 일년에 한 번밖에 없는 공식적인 집단 나들이였다는 점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한편 화전놀이와 화전가의 만남은 조선 후기, 그것도 19세기 초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이르러 여성들은 화전놀이의 내용과 그들의 감회를 담은 전형적인 화전가花煎歌를 지어서 즐기기 시작한다. 화전가의 창작과 가창이 화전놀이의 중요한 과정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여성들의 화전놀이는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물론 그 이전 시기 여성들의 화전놀이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이제 20세기 초중반, 경북 지역 반촌의 사례를 중심으로 화전놀이의 과정을 살펴보자. 해마다 춘삼월, 참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마을 또는 문중의 여성들이, 통문을 돌리는 등의 방법으로 화전놀이를 하기로 뜻을 모은다. 마음이 모아지면 시어른의 승낙을 얻은 뒤에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한다. 화전놀이에는 젊은이로부터 늙은이까지 두루 참여할 수 있지만, 대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함께 가지 않는다. 음식을 비롯하여 놀이에 드는 경비는, 화전계花煎契가 있으면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정하게 거출한다.

놀이 날이 되면 미리 준비한 음식과 조리도구, 지필묵紙筆墨 등을 챙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무의 반주를 위해서 장구와 같은 풍물악기를 가져가기도 한다. 지필묵은 현지에서 화전가를 지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성들은 어느 때보다 용모에 정성을 들여서 곱게 단장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놀이하는 장소는 보통 마을에서 십리 안팎의 거리에 있는, 산천경개가 수려한 곳이다.

놀이를 즐길 곳에 도착하면 우선 음식을 장만한다. 가져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만발한 참꽃 잎을 한 움큼씩 따와 화전을 만든다. 다음은 『동국세시기』에서 삼짇날의 절식인 화전을 설명한 대목이다.

참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그것을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 이것이 곧 옛날 오병熬餠의 한구寒具이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썩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혹 참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혹 붉은 색으로 물을 들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이것을 아울러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꽃, 그 중에서도 어느 산에나 지천으로 피어나는 붉디붉은 참꽃이 봄의 기호로 여겨지고, 그 꽃으로 만든 음식을 먹음으로써 시인 임제가 노래하였듯 “한 해 봄빛”을 “뱃속에 전”하는 것은, 세상을 떠난 이에게도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전을 다 부치고 푸짐한 먹거리가 마련되면, 이를 즐기는 가운데 본격적인 놀이판이 벌어진다. 놀이판마다 한결같지는 않지만 음주가무와 거리낌 없는 담화가 이루어지곤 한다. 이것 말고도 신명풀이가 끊이지 않도록 다양한 놀이들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윷놀이와 꽃싸움이다. 꽃싸움은 참꽃의 꽃술을 서로 마주 걸고 당겨서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놀이인데, 때에 따라서는 편을 갈라 승패를 가르고 상주賞酒와 벌주를 나누어 마시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화전놀이는 일반적으로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 정도까지 벌어졌다. 이 짧은 시간이 전근대의 여성들, 그리고 아직 전근대의 전통이 짙게 잔영을 드리우고 있던 20세기의 초중반을 살아온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화전놀이는 열악한 현실과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그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열망을 동력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화전놀이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다. 여성들만이 함께 집을 떠나, 수난 받는 존재로서 동질감과 강한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즐기는 화전놀이는, 억눌린 생명력의 해방이라는 신명풀이의 차원과 억압적 사회구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사회적 차원을 함께 갖고 있으며, 여성들은 이 두 차원의 해방을 통해서 존재의 고양을 체험한다. 그래서 화전놀이의 현장은 한 화전가에서 노래했듯이 ‘선경仙境’,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유토피아일 수 있다.

양적으로 보았을 때 화전놀이의 시간은 하루의 낮 시간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여성들을 규정하는 일상의 시간은 수천의 시간이다. 그러나 일상의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그 속에서 여성들의 집단적 해방체험은 불가능하거나 제한적이다. 해방체험, 그리고 그에 따른 시간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화전놀이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은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화전놀이가 기혼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의 양으로 가릴 문제가 아니다. 여성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보다 훨씬 더 화전놀이를 비중 있게 여겼던 것도 시간의 질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로가 얻은 철쭉과 그녀의 옷에 남은 다른 세상의 향기가 그러했듯이, 화전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여성의 손에 들린 참꽃과 그 때의 놀이를 되새기며 읊어보는 화전가는 일상까지 따라온 비일상의 숨결이다. 이 숨결은 지워지지 않고 그녀의 심신에 남아 열악한 일상을 견뎌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일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화전놀이에서 이룩한 해방의 체험은 그녀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지표 또는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화전놀이는 한낱 백일몽이 아니라 여성 해방의 축제이고, 유토피아의 주기적 체험장이자 그것의 일상적 실천을 준비하는 학습장으로서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글 | 한양명_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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