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박물관이 소장한

근·현대의 ‘전통의약 1호’ 이명래 고약

“‌이명래 고약은 고약과 발근고拔根膏로 구성되어 있어 종기의 상태에 따라 사용하며, 항생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비교적 안전한 치료 방법과 낮은 약값으로 민간의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한 덕에 근·현대의 ‘전통의약 1호’라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종기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병치레 중 매우 흔한 피부질환으로, 모낭염1)이 심해져서 생긴 결절을 일컫는다. 요즈음에는 위생 상태의 개선과 의학의 발달로 쉽게 치유할 수 있지만, 환경이 지금같지 않았던 과거에는 치료 방법도 쉽지 않고 재발률도 높아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숙종, 정조 등 많은 왕이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종기 치료를 전담하는 ‘치종청治腫廳2)’이라는 관청을 두었을 정도이다. 종기를 치료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있었겠지만, 전통적으로는 한약재를 다려 만든 고약을 환부에 붙이는 방법이 잘 알려져 있고, 심한 경우 배농排膿3)요법과 같은 외과적 처치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항생제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

‘고약膏藥’은 성분과 제조방법이 일부 바뀌기는 했지만 근래에도 제법 효과적인 치료제로 주목받는다. 국립민속박물관에도 근·현대 생활사자료로 수집한 고약이 총 25건 소장되어 있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명래제약소의 이명래 고약10건과 명래한의원의 이명래고약집1건, 명래제약소의 이명래 고약 밴드형3건, 천일약방의 조고약3건, 삼신제약의 중림 이고약3건, 제일약방의 제일고약1건, 이호차고약1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명래 고약’이다.

요즘에도 여전히 약국에서 구입 가능한 ‘이명래 고약’은 본디 프랑스인 신부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 1871~1933)가 고안한 것으로, 중국에서 접한 한의학 지식과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을 응용해 만들었다. 1894년 10월 조선에 도착한 그는 성일론成一論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였는데, 1895년 5월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에 부임한 후 천주교 대전교구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로 유명한 공세리 성당 본당을 직접 설계하고 건설을 지휘했다. 당시 공세리 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주민들 중에는 피부질환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성일론 신부가 고약을 제조하여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이 약을 ‘성일론 고약’이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훗날 ‘이명래 고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명래 고약’의 이명래李明來, 1890~1952는 원래 서울에 거주하는 천주교도였다. 당시 점점 심해지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아산으로 내려간 그는, 그 곳에서 성일론 신부를 만나게 된다. 이후 성당의 여러 잡무를 도우며 성일론 신부와 가까워졌고, 그의 고약 제조법도 전수받게 되었다. 그는 ‘성일론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한 끝에 1906년에 ‘이명래 고약’을 개발하였다. 1920년에는 서울 중림동에 고약가게를 차렸는데,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효과로 금세 유명세를 얻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명래 타계 후 ‘이명래 고약’의 맥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명래한의원’과 ‘명래제약(주)’ 두 갈래로 나뉘었다. 충정로의 명래한의원은 이명래의 고약 제조 방식을 고수한 이명래의 둘째 사위 이광진李光眞, 1996년 타계에 의해 유지되었고, 그 이후로는 이광진의 사위 임재형林宰馨이 이어 받았으나, 더 이상 후계자가 나서지 않았던 탓에 2011년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추억 속에 머물게 되었다.

약봉지(이명래고약) | 1980년대 | 10.5×13.7cm
이명래신고약(李明來伸膏藥) | 1971년(3월 4일) 제조 | 5.7×9×1.3cm
이명래신고약(李明來伸膏藥) 설명서 | 광복 이후 | 21×19.7cm
이명래고약밴드 | 1999년(11월 8일) 제조 | 20.1×6.7cm

국립민속박물관의 유물 가운데 명래한의원에서 판매했던 고약이 소장되어 있다. 봉투 앞면에는 ‘明來韓醫院’, ‘이명래 고약집’, ‘신경통·관절염·류마치스…(중략)…화상·동상·치질·모든 종창’ 등의 문구가 보인다. 그리고 짙은 갈색의 고약 하나가 종이에 싸여 동봉되어 있다. 이것을 불에 녹여 종기에 붙이면 고름이 빠지고 상처를 아물게 해주었으며, 종기 외의 각종 피부질환 치료에도 효과가 좋아서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녹색 바탕에 ‘이명래 신고약’이라는 명칭이 인쇄된 상자는 앞서 본 명래한의원의 고약과 다소 비교된다. 여기에는 고약과 발근고라는 두 종류의 약과 거즈가 들어 있고 상자 뒷면에 효능, 용법, 주의사항이 인쇄되어 있다. 함께 소장된 설명서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밴드형으로 제작되어 사용하기에 더욱 편리해졌다. 상자 앞면 좌측 상단에 인쇄된 ‘KGMP 적격업체제품’이라는 문구를 통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고약의 제조 및 품질관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상자 뒷면에 구체적인 원료와 분량을 명시한 것 또한 특징적이다.

이처럼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던 다른 한 곳인 ‘명래제약(주)’은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李容載 2009년 타계가 운영하던 곳이다.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한 때 을지로 3가에서 부친의 세례명을 딴 ‘요한의원’의 내과 의사로서 일하기도 했던 그녀는 고약의 현대화에 관심을 두었다. 1956년에는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을 세운 뒤 고약의 대량생산을 통해 일반 약국 어디에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고약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결국 2002년에 도산하고 말았다. 현재 우리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고약은 다른 제약업체에서 제조·판매권을 인수하여 생산된 것이다.

이명래 고약은 고약과 발근고拔根膏로 구성되어 있어 종기의 상태에 따라 사용하며, 항생제4)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내성5)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비교적 안전한 치료 방법과 낮은 약값으로 민간의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한 덕에 근·현대의 ‘전통의약 1호’라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국가 발전을 이루기 위해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이던 1960~70년대 지금보다 열악했던 생활환경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병증을 겪게 하여 적잖은 불편을 야기했다. 종기 또한 일상에 불편함을 더하는 피부질환이었을 것인데, ‘이명래 고약’은 그 불편을 효과적으로 해소해 주었다. 비단 이 때 뿐 아니라,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피부에 관한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아 가정상비약으로 갖추어 두는 약이었기 때문에 근·현대 생활사자료로써 가치 역시 충분할 것이다. 수장고에 보관된 낡고 촌스러운 ‘이명래 고약’ 봉투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인정人情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종기를 비롯한 여러 피부질환으로 고통과 불편함에 처한 이들이 효능을 바라며 절실하게 찾았을 이 봉투를 통해, 이명래의 시대에서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사명감이 전해지는 듯하다.

참고문헌
-방성혜, 2012,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시대의 창
-국립민속박물관, 1999,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20세기 문명의 회고와 전망-』
-이영남, 2016, 「한국 ‘근대 전통의약품’인 <이명래고약>의 역사」, 『藥學會誌』제60권 제5호 p.272~283
-이영남, 2019, 「고려시대 瘡瘇 의료대책」, 서울시립대 대학원 국사학과 석론
-천우신약(주) 홈페이지(www.cwpharm.co.kr/)
-공세리성당 홈페이지(www.gongseri.or.kr/)
-향토문화전자대전, 에밀 피에르 드비즈
-정원식 기자, 2014.09.12. 〈선대 유품, 저에겐 가족사지만 박물관에 있으면 역사의 기록〉, 《경향신문》

1) 모낭에 포도상구균 등의 병원균이 침투해 염증이 생겨 노란 고름이 잡히는 질환
2) 조선시대 종기(절) 등 외상 치료를 전문으로 하던 의료기관으로,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경국대전》에 1485년(성종 16) 의원(醫員)을 두어 치료에 종사했다는 기록으로 그 무렵에 생겼음을 짐작할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에 1603년(선조 36) 치종청을 다시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로써 설치되었다가 잠시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排膿, 곪은 곳을 째거나 따서 고름을 빼냄.
4)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1928년 플레밍에 의해 발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상용화에 성공해 194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민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4년부터이다.
5) 병원체(病原體)가 항생 물질의 계속 사용에 대하여 나타내는 저항성. 반복적으로 사용될 경우 약효가 저하된다.


글 | 권세리_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