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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 볕들 날

쥐구멍에 볕들 날
살다 보면 어떤 위험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쥐구멍에도 눈들 날 있다’는 여기서 더 떨어질 게 있나 싶은 바닥에 그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궁급할 때 임시변통할 ‘날 구멍’인 비상구를 미리 보아둬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은 본래 쥐구멍엔 볕이 들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훤히 보이는 데다 출입구를 낼 어리석은 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볕이 든다면 그건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는 말이며, 달리 생각하면 처지를 체념하고 푸념하는 이에게 볕 들 날이란 결코 없다는 말도 된다. 그렇게 보면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의 오랜 격언과 잇닿아 있다. 도움이란 빚을 도약이란 빛으로 갚을만한 이를 더 돕고 싶은 게 역시 사람의 마음이다.

쥐구멍으로 소를 몰려 한다
개가 제 몸만 한 개구멍으로 드나들 듯 쥐 또한 제 머리통 겨우 비집고 들어갈만한 쥐구멍만 뚫는다. ‘게도 구멍이 크면 죽는다’는 속담처럼 쥐 역시 필요 이상의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쥐구멍으로 소를 몰려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되지도 않게 분수 넘는 과욕을 경계하는 속담이다. 가난한 옛날엔 집 한 채 값인 소를 집집마다 둘 순 없었다. 그래도 밭갈이 날짜가 겹치게 않게 서로 빌리고 빌려주고 했으니 마을에 몇 마리만 있어도 너끈했다. 하지만 소를 빌릴 때 아무래도 저자세가 되고, 때론 소 주인한테 고까운 소리 들어도 ‘어휴, 소만 아니면 콱!’ 하며 심사가 꼬이기 마련. 그래서 쥐구멍(살림)으로 자기도 번듯하게 소 좀 몰아보려 무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 없는 살림에 몇 번 안 쓸 비싼 것을 지르고 들이곤 하듯 말이다.

쥐구멍은 또한 창피할 때 찾는 곳이다. 오죽 낯 뜨겁고 창피하면 들어가지도 못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할까. 그렇게 작은 ‘쥐구멍으로 통영갓을 굴려 낸다’는 속담은 속이거나 훔치는 머리와 재주가 매우 비상하고 약삭빠름을 말한다. 전남 통영에서 만드는 갓은 갓의 챙 부분인 양태가 넓고 곡선의 맵시까지 훌륭해 제작이 주문을 못 따라갔다고 한다. 어느 시대건 꼭 나쁜 쪽으로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양태 넓은 갓을 가로로는 안 되기에 세워서 벽 틈으로 빼돌리지 않았을까.
또한 쥐구멍은 교토삼굴狡免三窟, 토끼굴처럼 구멍이 여럿이다. ‘쥐도 들 구멍 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은 한낱 쥐조차도 유비무환으로 위험을 대비할 줄 안다는 말이다. 후다닥 숨어버린 쥐구멍 앞에서 부지깽이 들고 백날 기다려도 쥐는 도로 안 나온다. <톰과 제리>의 제리처럼 뒤쪽에 있는 다른 구멍으로 나와 어리석음을 비웃을 뿐이다.

쥐구멍이 황소구멍 된다
쥐구멍이라고 쥐만 나다니지는 않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비밀 또한 쥐구멍으로 나다닌다. 산속이나 정자나무 아래서 ‘너만 알고 있으라’며 누구도 알아선 안 될 말을 속닥이지만 나무 위에 날개 없는 새가 앉아 있던 사실은 모른다. 방문을 닫아걸고 쑥덕쑥덕 모의하면 아무도 모를까? 뒤뜰로 난 창문 밑에는 두 발로 걷는 쥐가 귓구멍을 찰싹 붙이고 있다. 물 샐 틈은 없어도 비밀 샐 틈은 꼭 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단속했으면 될 일을 장정 여럿이 나서도 안 될 때까지 키운다는 것이 ‘호미로 막을 걸 갈래로 막는다’다. 같은 속담으로, 일이 커질 때까지 놔뒀다가 결국 억센 일을 당하게 된다는 ‘쥐구멍이 황소구멍 된다’가 있다. 한 번 난 구멍은 커지면 커졌지 절대 도로 줄지 않는다. 작은 문제가 터졌을 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귀찮거나 두려워 뒤가 켕기면서도 쥐구멍이 개구멍 되도록 외면한다. 개구멍이 황소구멍까지 커지니 더럭 겁이 나 온몸으로 막아보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손길 한두 번이면 막을 문제를 방치하다 재산 1호인 소까지 팔아야 간신히 막는다는 뜻이다. 흔히 직장에서 작은 실수를 엄청난 문제로 키우는 원인이 ‘쥐구멍 냈다고 혼나고 실망시킬까 봐’라고들 한다. 하지만 실수는 병가지상사. 다독임과 재도전 기회 대신 윗선 면피용 질책이 난무하는 회사라면 수서양단首鼠兩端으로 굴 밖에 머리 내밀고 사방 눈치 보는 쥐가 어쩌면 딱 맞는 인재가 아닐까 싶다.

고양이 쥐 생각하듯
쥐와 함께 등장하는 동물은 고양이다. 돌레돌레 눈치 살피며 쥐걸음 하다 고양이에게 딱 걸리는 그 순간을 ‘고양이 앞 쥐걸음’이라고 한다. 오금이 저리고 발바닥이 얼어붙는 순간이다. 고양이 앞의 쥐만 그럴까. 우리 주변에는 피할 수만 있다면 꼭 피하고 싶은, 두렵고 악랄한 사람도 있다. 그 악랄한 인간도 보는 눈들 앞에서는 상대를 ‘쥐 잡듯이’는 못하고 ‘고양이 쥐 생각하듯’ 인정사정 봐주듯 연기하며 챙겨주기 마련이다. 한편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걸 알기에 고양이는 절대 쥐를 한 번에 잡지 않는다. 툭툭, 툭툭. 쥐가 반쯤 자포자기로 넋 나갈 때까지 집요하게 몰아댄다. 마치 ‘기회 줄 테니 도망가라’는 아량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만약 체면 망가질 이목이 없다면? 고양이는 와락 쥐의 목덜미를 물 것이다. 그렇기에 쥐로서는 결국 궁지에 몰릴 걸 빨리 알아채는 수밖에 없다.

쥐 하면 소도 떠오른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에는 여물 훔쳐 먹으러 외양간에 들어왔다 좁은 데서 미처 피하지 못한 쥐가 나온다. 쉽게 얻으려는 욕심에 운도 참 없는 일을 자초하는 쥐. ‘서목촌광鼠目寸光’처럼 한 뼘 앞 욕심에만 눈 밝아 그다음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혀 보질 못한다. 앞뒤 안 재고 급한 욕망에 눈이 멀면 ‘쥐 잡으려다 장독만 깰’ 뿐 아니라 남의 뒷걸음질에조차 밟혀버리기 일쑤다.

매년 새해가 되면 그해의 십이지 동물을 예찬하며 근거 없는 복을 희망한다. 하지만 막연히 큰 기대와 포부라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즉 우레와 같은 소리에서 찍소리로 끝나는 일이 많다. 옥돌을 옥으로 다듬는 데 필요한 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같은 산의 돌은 경도硬度가 같아 부딪히면 서로 깨지지 갈리진 않는다. 반면교사가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면, 타산지석은 ‘나는 그럼 어떡해야 할까’다. 작년과 똑같은 돌로는 역시 쥐뿔 해놓은 것도 없는 연말을 맞게 된다. 기해년이 반면교사와 타산지석이면 경자년을 위한 ‘쥐피쥐기’는 지금이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김승용 | <우리말 절대 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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