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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고유告諭

새로 부임한 순창군수淳昌郡守 이성렬李聖烈이 백성들에게 알리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서류 소장품 중 하나인 ‘고유告諭’는 1892년 전라도 순창군淳昌郡 팔등면八等面에 내려진 일종의 행정문서이다. 세로 크기는 34cm정도이지만 가로 길이는 685cm에 달하는 이 필사본 문서는 총 15장의 종이를 이어 만들었으며, 한자로 기재되었으나, 서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에 대하여는 한글로 쓴 해석이 붙어 있다.
본래 소장품의 명칭으로 할 만한 제목이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으나 고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서문에 ‘郡守告諭八等面大民庶民尙明聽之哉’1)라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고, 일정 직위를 가진 지방관이 관할 백성들에게 어떠한 사실을 알리는 일이나 그 내용을 일컬어 고유라고 하기에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유의 서문에 앞서서는 이 문서의 수신처가 적혀 있는데, 팔등면에 소속되어 있는 사정리射亭里·구항리龜項里·신남리新南里·신평리新坪里·입석리立石里 등 5개 리가 그곳이다. 수신 대상이 명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서의 내용을 감안하여 보건대 팔등면에 국한된 내용이라 보기에는 힘들며, 아마도 같은 내용의 문서들이 팔등면 이외의 지역으로도 동시에 수발되었을 것이다.
고유의 내용은 크게 이 문서를 작성하게 된 동기를 밝힌 서문과 총 35개조에 이르는 부조리와 폐단의 혁파 방향과 징벌조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문 문서 이후에는 같은 내용을 한글로 풀이해 두어 한자를 알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고유에 기록된 35개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는 원만한 관계를 통해 다양한 송사訟事의 원인을 줄이고, 반드시 송사가 필요한 경우에도 그에서 올 수 있는 폐단을 없앨 것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둘째로는 세금을 걷어 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수탈과 폐단을 근절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셋째로는 농업과 상업 등 생업의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매점매석과 횡령, 이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백성들의 피해를 철저히 막을 것이며, 넷째로는 지역사회의 윤리와 기강을 바로 잡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로는 행정 절차의 폐단을 바로 잡고, 관리들의 규율을 바로 세울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고유(告諭)


아울러 재미있는 것은 한글 풀이 이후에 등장하는 발문跋文의 내용이다. 이에는 군수의 고유를 어떠한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尊頭民每於朝夕無事時會同大小民一一告諭然後可以謂令行意及2)’이라 기록되어 있다. 존두민은 존위尊位와 두민頭民을 함께 일컫는 말로, 1895년 반포된 향회조규鄕會條規를 통해 명시된 일종의 지역 자치체의 임원이라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통해 한명 한명에게 그 뜻을 모두 알려야 한다는 것은 위의 35개조의 내용에서도 파악되듯, 일반 백성들이 고유의 내용을 자세히 알도록 하여 사회적 약자로 겪을 수 있는 각종 어려움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군수 이성렬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유의 뒷부분에 누구나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본을 달아 놓은 연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성렬이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1800년대 후반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로 인해 불안한 사회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열강의 압박이 지속되는 상황과 수탈을 일삼던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에 반하여 불붙은 갑오농민전쟁 등 그 시기에 일어난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순창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당시 순창은 농민군의 세력이 우세한 지역이기는 하였으나, 지배 권력층과 일련의 협조관계를 이루어 다른 지역보다 안정적인 국면 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全琫準 사이에서 논의된 관민상화官民相和에 따라 순창에도 집강소執綱所3)가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정작 순창군수인 그가 이규홍李圭弘의 오하일기梧下日記에 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갈등을 겪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이성렬 본인은 농민군의 활동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순창이 농민군의 봉기에서 비롯된 전쟁 상황에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연유는 그가 추구한 위민爲民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성렬이 동학농민군 김개남金開南과의 문제로 순창을 떠나고자 했을 때 아전들과 백성들이 길을 막아서며 머물기를 바랐다는, 김재홍金在洪의 영상일기嶺上日記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며, 백성들의 삶에 대한 그의 관심어린 입장이 봉기와 체제유지의 양 극단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자의 역할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현재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석보리 마을회관 앞에는 1900년에 세워진 비석이 하나 남아있다. 상당히 마모되어 있지만, ‘郡守李侯聖烈永世不忘碑4)’라 새겨진 이 비신을 보면 순창군수 이성렬의 공적을 치하하는 기념물임을 알 수 있다. 보통 공적비의 다수가 지방관과 지역 유지의 이해관계에 의해 세워지고는 한다지만, 1894년 순창군수직을 떠난 후 6년 뒤에야 영세불망비가 세워진 것에 대해서 순창을 지킨 그의 업적을 기리는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라 믿어보고 싶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인 ‘고유’는 상설전시관1 ‘한국인의 하루’의 초입에 있는 ‘시찰’ 부분에 전시되어 있다.

1)군수가 팔등면의 대민과 서민에게 고하니 원컨대 이를 분명하게 들으라
2)존두민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일이 없을 때 백성들을 모아 하나하나 자세히 전할 것이니, 그런 후에야 가히 영이 지켜지고 그 의미에 이를 것이다
3)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각 군현에 설치했던 자치기구
4)군수이후성렬영세불망비


글 _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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