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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을, 바다도 단풍 든다

   ⓒ성일한_공유마당

집 대문만 나서면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요양이나 휴양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면서도 처음 겪어보는 바닷가에서의 오랜 머무름은 그동안 내 마음에 담고 있었던 바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해주었다. 사람들은 그 오지 같은 곳에서의 생활이 뭐 그리 좋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날들을 떠올리면 3대가 복을 지어야 얻을 수 있는 행운이 나와 함께했던 것 같아 흐뭇해진다.

1월 설이 되기 전에 마을에 들어갔다. 낯선 곳에의 입성을 호된 감기 몸살로 때운 다음날부터 난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굽어보았다. 눈으로도 확인하고 사진으로도 남겼다. 어제 같은 오늘이라 생각했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물의 색도 바뀌고 바람의 방향도 누가 알세라 조금씩의 차이를 보여줬다. 마치 야생동물처럼 털을 바싹 세워야 그 미세한 변화를 알 수 있었지만 자연이 바다를 다스리는 그 마을에선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오는 내음도 그랬다.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의 날들을 그렇게 바다가 변하는 모습을 보며 그 속에서 더없이 만족한 날들을 지냈지만 난 그해 가을이 오기 전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한 곳에서 사계절을 다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내 마음에 바닷가 마을의 가을에 대한 궁금함과 아련함을 남겼다. 그리 아름답던 바다는 가을에 어떤 색을 보여주고 있을까? 매일 지켜보던 장면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마음의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하고픈 것을 챙기지 못하면 병이 되는 법. 다음 해 가을 난 다시 그 바다 앞에 섰다. 그리도 그리고 그리도 궁금했던 그 마을의 가을 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가을 바다는 나머지 3개의 어떤 계절도 흉내 낼 수 없는 풍성함과 성숙함, 그리고 물빛으로 내공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만나 그가 품은 저력을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행운이라니. 알아주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저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이응준_공유마당
ⓒ 이응준_공유마당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이고 겨울엔 낭만을 길어 올리려는 이들이 주로 찾는 바다의 가을은 사실 좀 외롭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이들은 자연이 낼 수 있는 가장 고운 색을 뿜어내는 단풍을 쫓아 산으로 계곡으로 향한다. 바다도 가을이면 또 다른 색을 가진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면 다들 산과 계곡을 포기하고 몰려들까 싶어 주저하게 된다. 그래도 이젠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지 않으련다. 가을의 바다가 외로워할까 봐. 그리고 함께 가을 바다를 공유하고 그래서 마음에 작은 행복이라도 얻고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나도 바다도 더 가을다워질 테니.

유명세를 치르는 바닷가가 아니면 더욱 좋다. 많은 이들이 찾는 여름이나 겨울이 아니면 더더욱 말할 나위조차 없다. 올가을이 더 달아나기 전에 여러분만의 작은 가을 바다를 하나쯤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들이 덜 탐하기에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주고 보여주는 가을 바다의 넓고 깊은 품을 그대들은 마다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자 가을 바다로 떠나라. 대신 맘이 놀랄 준비는 필수!

글_박선주 |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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