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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고향을 노래하다, 시대를 노래하다

‘히트곡’에는 한 사회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특정 시기 인기가 높았던 대중가요를 통해 당시 사회상과 사고방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대중가요사에 주기적으로 출현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고향’이다. 근대 이후 한국인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까?

일제강점기 고향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1900년 고종의 칙령으로 서양음악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대중가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0~40년대였다. 대중가요 초창기, 가장 인기 높았던 고향 노래는 큰 키의 미남 가수 고복수가 부른 ‘타향’이었다. 이 곡의 원제는 ‘타향’이지만, 첫 가사 “타향살이 몇 해던가” 때문에 자연스레 제목이 ‘타향살이’로 바뀌었다. 이 곡에는 작사가 김능인의 애달픈 마음이 담겨 있다. 11년째 고향을 떠나 어렵게 살아가던 자신의 마음을 글로 옮긴 것이다. ‘타향’의 인기 요인에는 시대적 상황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고복수가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객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복수는 한국 가요사 초창기 팬덤을 누린 대표적 가수로서 회자된다. 수많은 팬레터와 선물을 받았고, 피로 애자를 쓴 혈서를 받기도 했다.

1949년 발표된 ‘비나리는 고모령’ 또한 인기 있는 망향가였다. 일본 도쿄의 우에노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가수가 된 현인이 불렀다. 작사가는 유호였는데,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간” 아들이 타지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망향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모령顧母領은 대구 수성수 만촌동에 위치한 고개의 옛 지명이다. 고모령은 대구선 고모역이 있던 곳으로 1925년 영업을 시작해 2004년에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정말로 사라진 고향이 된 셈이다. 고모령의 뜻이 ‘어머니가 돌아본다’는 의미의 고모顧母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유호는 고모령을 소재로 작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전쟁의 상처, “남쪽나라 내 고향

20세기 중반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다. 1950~60년대 히트한 고향 노래는 제주도 출신 가수 백난아의 ‘찔레꽃’과 1966년 발표된 오기택의 ‘고향무정’이 있다.
찔레꽃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 가난했던 시절 한국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야생화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처음 돋는 새순의 껍질을 벗겨 먹으며 허기를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로 시작한다. 멀리 북녘땅에서 남쪽을 그리워하며 만든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이 곡의 작사가는 진방남의 히트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지은 김영일이다. 그는 1943년 6월 북간도의 친지를 방문했다가 활짝 핀 찔레꽃을 보고 고향을 생각하며 가사를 만들었다. 북간도에서 만난 친지가 보여준 보통학교 졸업식 사진에서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자친구들의 사진을 보며 먹먹한 가슴으로 펜을 들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남녘과 북녘은 서로에게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되었다.

오기택의 ‘고향무정’은 1960년대 후반의 인기곡이었다. 이 노래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실향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담겨 있다. 바로 작사가 김운하의 슬픈 사연이다. 김운하의 친구는 평양 숭실대 교수 김민규의 아들이었다. 김운하는 김민규가 공장 감독관으로 있던 함경북도 웅기의 정어리 공장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웅기 부근 국경 지대인 경흥의 아오지 탄광에는 북한 정부에 끌려 온 사람들이 넘쳐났다. 김민규는 자신의 아들과 김운하에게 월남을 권유했고, 두 젊은이는 남으로 내려왔지만 김민규는 결국 북녘에 남았다. 세월이 흐른 후 임진각을 방문한 김운하는 함경북도 응기에 남겨진 친구의 아버지 김민규를 그리워하며 이 곡을 작사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낙관주의, “저 푸른 초원 위에

1970년대 대중음악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불세출의 트로트 가수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나훈아와 남진이다. 두 사람은 라이벌답게 1971년과 1972년에 고향을 소재로 한 빅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다.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과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197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고향이 좋아’를 비롯한 다수의 고향 노래를 부른 김상진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훈아는 김상진보다 더 많은 200여곡의 고향 노래를 취입한 가수였다. 당시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나훈아의 인기를 분석한 결과, 수많은 고향 노래를 통해 한국인의 향수를 자극한 것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판명되었다.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은 1968년 추석 무렵 작곡가 박정웅이 고향이었던 경남 밀양을 생각하며 만든 것이었다.

197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떼창곡’이었던 ‘고향역’ 또한 사연이 있다. 이 곡은 무명의 작곡가 임종수가 나훈아를 만나기 위해 오아시스 레코드를 3개월간 매일 출근하다시피 찾아가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낸 노래였다. 원래 ‘고향역’은 1970년 ‘차창의 어린 모습’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지만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가 2년 후 가사를 일부 고쳐서 ‘고향역’으로 발표해 히트한 것이다.

반면 남진의 ‘님과 함께’는 고향을 추억하기보다 희망과 대리만족을 준 고향 노래로 크게 성공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국가재건을 위해 초가집을 부수고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군가와 흡사한 흥겨운 노래들 또한 많이 발표되었는데 고향 작사, 남국인 작곡의 ‘님과 함께’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비롯된 노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소”는 이촌향도의 시대 고생스럽게 살던 국민들이 언젠가 돈을 벌어 귀향한 후 번듯한 집을 짓고 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담고 있었다.

남과 북, 노래를 통해 고향을 그리워하다

1980년대 고향 노래로는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부른 ‘향수’가 손에 꼽힌다. ‘향수’는 정지용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것인데, 정지용이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었기 때문인지 실향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향수’가 큰 인기를 얻자 박인수는 국내 정상급 성악가 15명이 단원이 되는 국립오페라단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성악가로서의 품위 손상’, ‘지나친 상업성’이 이유였다. 언론은 이 일을 다루며 클래식 음악계를 비난했고 여론도 박인수의 편에 섰다. 80년대의 고향 노래 ‘향수’가 받은 국민적 사랑은 결국 클래식의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쯤에서 북한으로 방향을 잠시 돌려보자. 김정일 위원장이 좋아했던 남한 노래 중 하나가 바로 고향 노래였다. DJ 이종환이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작사한 이수미의 1972년 히트곡 ‘두고 온 고향’ 얘기다. 2017년 벌어진 김정남의 암살 사건에서도 남한의 고향 노래가 등장한다.
2017년 2월 13일 김정은 위원장의 이복형으로 해외를 떠돌던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암살당했다. 김정일의 장남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북한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후 김정남의 측근을 통해 의외의 사실이 알려졌다. 김정남이 평소 노래방에서 나훈아의 ‘고향으로 가는 배’를 수차례 반복해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고향으로 가는 배’는 ‘잡초’와 ‘울긴 왜 울어’가 수록된 1982년 앨범에 묵혀있던 곡으로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인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세월이 흐르며 남북한 합동 행사의 선곡도 바뀌었다. 과거 행사 마지막의 합창곡은 언제나 ‘우리의 소원’이었는데, 2000대부터는 한돌 작사, 작곡의 1989년작 ‘홀로아리랑’이 선곡되고 있다. 1990년 서유석이 부른 ‘홀로아리랑’은 북한과 관련된 여러 공연에서 자주 선택된다. 2001년 김정일의 초청으로 성사된 김연자의 공연과 2005년 조용필의 평양 공연에서 울려 퍼졌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북측 삼지연 관현악단이 마지막곡으로도 불렀다. ‘홀로아리랑’은 실향민이었던 한돌의 부친이 남긴 유언에서 시작된 노래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통일이 되면 북에 있는 형을 만나서, 잠시 헤어진다고 생각했지 버린 것이 아니라고 전해 달라”는 한 맺힌 한마디로부터 탄생한 노래였다.

고향 노래가 품은 시대정신

고향을 노래한 대중가요는 셀 수 없이 많다. 클린트 홈즈의 노래를 번안한 이용복의 1972년작 ‘어린 시절’은 물장구치고 다람쥐 잡던 고향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곡이다. 1976년 발표된 조용필의 출세작 ‘돌아와요 부산항에’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원래는 1972년 만들어진 평범한 트로트 곡이었지만 1976년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고국 방문이 처음 허가된 것을 계기로 가사를 바꾼 것이다. “님 떠난”을 “형제 떠난”으로, “그리운 내 님아”를 “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꾼 덕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공전의 히트를 누렸다. 혼혈로 태어나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삶을 살며 도시민의 고독을 표현했던 윤수일은 1981년 ‘제2의 고향’을 통해 전통적 고향이 아닌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로했다.
시대의 마디마다 다채롭게 출현한 고향 노래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고향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박성건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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