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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몸과 맘의 무장해제, 휴가

휴가休暇는 ‘틈을 내어 쉬다’ ‘느긋하게 지내다’ ‘여유 있게 지내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단어다. 그러나 요즘의 현실은 이와 딴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때론 주인공인 느긋함과 여유는 집에 두고 휴가길에 오르는 장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휴가야! 너의 문자적 해석은 그냥 박제가 되어버린 거니?”

여름이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름이 가을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즈음 지인들을 만나면 가장 흔한 인사말이 “휴가 다녀오셨어요?”다. 시기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어울리는 대화다. 그런데 ‘휴가=여름’이라는 공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례화된 것은 언제부터, 왜 일어난 현상일까?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살다 보니 생활 패턴은 날씨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다. 같은 일을 해도 여름은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일의 능률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른 계절에는 없는 ‘복달임’ 음식이 이어져 내려온 것만 봐도 버텨내기가 쉽지 않은 시기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해의 중간자락인 여름에 상반기의 피로를 지우고, 하반기에 쓸 기력을 채우러 떠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초중고에 다니는 자녀를 둔 가정의 휴가는 아이들의 학원 방학기간을 택해야 하는 신문화가 생겨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휴가’가 변신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이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은 아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래전 휴가의 어느 날로 나를 데려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난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서울로 이사를 오긴 했지만 10여 년을 지낸 부산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은 배경이 바다다. 기억의 쪼가리들은 당시에 찍은 흑백사진에서 주로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찾았던 바다도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기보다는 잔잔한 잿빛 물결이 일렁일 뿐이다. 모래사장엔 띄엄띄엄 무명으로 된 햇빛 가림막이 펼쳐져 있고, 주변엔 시커멓고 투박한 고무 튜브들이 몇 개씩 놓여 있었다. 가림막 아래엔 엄마가 정성껏 챙겨온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 밀짚모자로 얼굴을 덮은 아버지의 편안한 낮잠 모습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 다음 기억의 장면은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살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모래 장난을 하고 그게 지겨워지면 끌기에도 버거운 튜브를 타고 파도에 몸에 맡기고 물 위를 떠다녔던 것이다. 그러다 멀리서 ‘아이스케키’ 통을 맨 장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달려가 부모님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고, 유리 상자를 어깨에 메고 ‘망개떡’을 팔러 다니는 아저씨를 쫒아가기도 했다. 그 안에는 나뭇잎에 싸인 떡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도 처음 망개떡을 봤을 때의 신기함을 잊을 수 없다. 바삐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든 소리는 파도를 넘지 않았다. 밤엔 탄 피부의 따가움이 잠을 설치게 했지만 그 불편함조차 즐거움이었던 거 같다. 며칠이 지나면 팔, 다리, 등에서 피부의 껍질이 허물처럼 일어나고 그건 오히려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고 받은 훈장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기억은 몸과 맘의 모든 나사를 풀고 완전 무장해제를 하는 진정한 ‘쉼’으로의 몰입이었던 거 같다. 소음도 인공도 억지도 간섭도 없는 완전한 평온함. 그 잔잔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모든 찌꺼기까지 다 내려놓고 진공상태처럼 어떤 균도 살 수 없는 순수 세상에서의 휴식 같은 휴가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바다와 같은 느낌의 휴가를 이젠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쉼’이 절실하게 필요한 바로 그 순간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고 늦은 휴가라는 건 없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휴가’를 꿈꿔본다. 그게 꼭 여름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나의 몸과 맘이 함께 진정으로 원할 때. 그때 떠나야 하는 것이 휴가다. 그래야 몸과 맘의 모든 독을 다 비우고 돌아올 수 있다.

글_박선주 |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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