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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인천 근현대 상업역사의 증인, 신포국제시장

오늘날의 활기찬 이미지와 달리, 1883년 개항 전까지 인천은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사람보다 파도 소리가 더 요란한, 작고 한적한 어촌. 항구가 열리며 모든 것이 변했다. 외국인과 외래 문물은 인천항을 통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인천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인천의 그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은 곳이 신포국제시장이다. 시장의 이름을 구성하는 두 낱말 ‘신포’와 ‘국제’에는 인천의 변화상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다. 신포의 어원이자 행정구역인 신포동은 ‘새롭게 번창하는 포구’를 뜻한다. 신포국제시장 주변에는 과거 ‘새롭게 번창했던 포구’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바다 전망과 함께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신포국제시장으로 향하는 골목골목이 그렇다. 개항 이후 조성된 외국인 거주지 조계租界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서양인이 거주했고, 현재까지도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근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옛 건축의 풍경을 지나 신포국제시장으로 들어서면,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기억의 조각이 아직 남아 있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채소를 사고파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 얘기다.

인천의 중국인, 일본인에게 채소를 팔다

개항기 시장 안에는 ‘푸성귀전’이라 불리는 구역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20여 개의 채소 가게가 모여 있는 거리였다. 채소를 재배해 파는 것은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그 채소를 산 것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거래되던 채소가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양파, 토마토, 당근, 완두콩, 연근 등이었다는 점이다. 신기한 채소의 모습은 물론, 중국인과 일본인이 서툰 한국어로 흥정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항과 함께 시작된 인천의 낯설고 독특한 광경이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은 계속 늘어났고 서구식 호텔이 들어서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업소도 증가했다. 중국요리 집과 일식집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채소의 수요 또한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유통과 거래의 주역은 역시 중국인이었다. 1920년대 초반까지 인천에서 소비되는 채소의 70%를 중국인들이 재배하고 판매했다. 신포국제시장의 초창기 역사는 푸성귀전에서 시작되고 맺어지는 셈이다. 인천이라는 도시의 태동이 그랬듯 신포국제시장은 그 기원부터 ‘국제적’이었다. 그 국제적 면모에는 그늘도 있었다.

푸성귀전이 사람들을 모으자 그 주변에 다른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생기며 시장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이곳은 공권력에 의해 세워졌다는 뜻의 ‘공설시장’이라 불리웠다. 어시장은 제1 공설시장, 채소 시장은 제2 공설시장이 되었다. 제1 공설시장 건물은 1929년에, 제2 공설시장 건물은 1933년에 설립되었다. 새로 생긴 시장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수산물을 파는 어시장이었다. 1890년 정흥택이 세운 어시장은 인천 최초의 수산시장이었다. 바닷가라는 특성과 맞물려 어시장은 금세 몸집을 키웠다. 인천 연안뿐 아니라 충청도에서 잡힌 수산물까지 취급할 정도였다.
머지않아 일본인들이 어시장의 이익에 눈독을 들였다. 상권을 뺏기 위해 어선을 마련하고 어시장을 개설했지만, 지역에 뿌리를 견고하게 내린 신포동 어시장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정치적 힘을 등에 업고 일본인들이 세운 인천수산주식회사가 신포동의 어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1930년대 인천 지역 수산시장은 수산물 유통의 핵심인 얼음을 독점한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신포동에 없는 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탈을 목적으로 삼은 시장 활성화 정책에 따라,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이었던 신포국제시장은 번성했다. 외국 문물이 유입되던 인천의 특성을 등에 업은 채 ‘신포동에 없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다양한 물건이 거래되었다. 물건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시장 길목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국전쟁은 신포시장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전쟁의 여파로 신포국제시장은 벽만 남긴 채 전부 파괴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푸성귀전에서 물러났고, 전란이 끝난 땅에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주도권도 한국인의 손에 쥐어졌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이 시장의 주역이 되었다. 이 무렵에 ‘신포시장’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전쟁 이후 복구가 진행되면서 동인천역 주변에는 신포시장을 비롯해 배다리시장, 송현시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신포시장이 다시 개설된 것은 1951년이다. 한동안 신포시장은 노점으로만 이루어진 시장이었다. 정식으로 건물을 갖추고 시장으로 등록한 것은 1970년이다. 이 무렵 신포국제시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모은 것은 송현시장에서 시작해 신포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만두가게였다. 만두를 포장하는 사람만 10여 명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오늘날 분식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쫄면을 세상에 알린 곳 또한 이 만두가게였다.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쫄면의 고향은 신포국제시장인 셈이다.

신포국제시장, 인천의 명물로 남다

시장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신포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2002년의 일이다. 인천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면서 인근의 차이나타운과 근대 건축물 거리와 연계한 현대적인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이제 신포국제시장을 상징하는 명물은 닭강정이다. 닭을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시장을 덮을 정도로 현지인과 여행자들에게 두루 사랑받고 있다.
신포국제시장은 이국적인 푸성귀전에서 시작해 어시장으로 몸을 키웠고 오늘날은 음식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그 과정에는 때로는 더디게 때로는 빠르게 달려온 인천의 변화가 추억처럼 담겨 있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이경덕│문화인류학자(『대한민국 전통시장 100』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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