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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셰프 이유석의 주방

나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9년간 프렌치 비스트로bistro_레스토랑보다 작은 규모의 식당 ‘루이쌍끄’를 운영한 셰프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식당 영업을 일단 마무리하기로 결심하고, 올해 초 영업을 종료했다. 4월의 첫날, 나는 식당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의 일터인 주방을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2010년 가을 이곳을 열 때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 오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방기기를 중고로 구매해야만 했다. 경기도 하남시에 밀집해 있는 중고 주방용품 업체를 주로 활용했고, 접시류나 냄비류 등의 작은 주방 도구는 황학동을 뒤져 구했다. 장사를 접은 식당들에 가서 얻어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장비를 어렵게 마련해 나의 일터인 주방을 만들어갔다. 그 때문인지 선후배 셰프들이 나를 응원하러 내 주방을 찾아줄 때마다 무척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이유석 셰프는 주방에서 셰프복 대신 셔츠를 입는다

 

주방은 꿈, 열정, 고민, 추억이 담기는 곳

보통 사람들과 달리 셰프에게 주방은 단순히 요리를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다. 주방은 셰프의 꿈이 시작되는 곳이자 동료들과의 추억이 담기는 공간이다. 마치 자동차의 엔진처럼 매일매일 ‘열정’이라는 연료를 태워가며 하루하루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식당 경영권을 가진 ‘오너 셰프’로 식당을 운영하면서 주방에서 새벽까지 메뉴 개발을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밤이 수없이 많았다. 같이 일하는 후배 요리사들을 그들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냈다. 우리 주방에서는 매일매일 ‘아드레날린의 경연’이 펼쳐졌다.

 

요즘은 예전과는 다르게 각종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스타 셰프’의 꿈을 가지고 요리사의 길을 택한 어린 친구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실제 업장에 와서 셰프의 일터에 지나지 않는 주방을 처음 경험했을 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프로 요리사에게 주방은 요리를 가르치고 배우고 경험하게 해주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닌, 치열하고 고된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방은 매우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곳일 수밖에 없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일하지 않으면 음식이 늦게 나가거나 잘못 나가게 되는 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무섭다. 한 번의 불만족 때문에 다시는 그 식당을 찾지 않기도 한다. 셰프들은 여러 TV 드라마에서 주방 곳곳을 누비면서 후배 셰프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건 바로 주방의 긴장감을 높여서 ‘사고’를 막기 위함이다.
한편으로 주방은 셰프들에게 ‘집보다 더 집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셰프들은 집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주방에서 머물면서 가족이나 애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철거 직전의 내 주방. 네 시간 만에 텅 비어버린 주방에서 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주방 도구는 셰프의 전우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워 주방과 짐을 정리했다. 서 있을 힘도 안 남았을 때 철거업체가 도착했다. 그로부터 네 시간 만에 나의 소중한 식당이 무서운 속도로 부서졌다. 텅 빈 주방을 보자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나의 식당은 손님들이 앉은 바bar에서 주방 안이 들여다보이는 ‘오픈 키친’이어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주방 바로 앞 바에 앉은 단골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재작년에는 바비큐를 하다가 주방의 덕트에 불이 옮겨 붙어 소방차를 부른 악몽 같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철거하는 과정에서 주방 도구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또 쓰렸다. 덩치가 큰 주방 도구의 전면은 매일 윤이 나게 닦지만 그 뒷면은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정리하면서 뒷면이 모두 녹이 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너무 낡아진 냉장고부터 냉동고, 식기 세척대, 튀김기 등이 모두 전쟁터의 시체처럼 실려 나가는 모습에 나는 내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철거업체 사람들은 녹슨 주방 도구들을 보면서 “이거 다 해야 고작 삼십만 원 정도 나와요”라고 가볍게 얘기했지만 내게는 지난 십 년을 함께 한 전우 같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주방 도구는 셰프의 친구와도 같다

 

모든 직업인은 자신의 일터, 그리고 작업 도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셰프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무게가 쌓여가면서 번쩍번쩍 윤이 나던 주방기구들은 점점 더 낡고 노쇠해지고 주방의 사람들도 계속 나이를 먹어가면서 또 다른 이들로 바뀌어 간다. 그렇게 주방에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추억, 흔적이 쌓이면 주방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셰프들의 삶이 담긴 터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서른 살에 시작해 서른아홉에 마무리한 나의 주방, 나의 30대가 벌써 그리워진다.

 

 

글_이유석│전 ‘루이쌍끄’ 오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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