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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부엌 근현대사

한국의 부엌은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많이 변해왔다. 공간의 구조뿐만 아니라 식생활과 주생활이 변하면서 부엌의 기능과 의미도 달라졌다. 부엌은 그 공간의 주인이었던 여성들의 삶이 압축적 또는 은유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지난 백 년 동안 부엌에서 일어난 공간 구조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근대화·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는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일상생활을 전면적으로 바꿔놓았다. 당연히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불과 10년 전까지 부엌은 여성 전용공간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부엌은 현대화를 향해 달려왔으며, 과학 기술의 발달과 상업주의 그리고 서구화가 그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과정은 지난했고, 때로는 전통과 서구적 현대가 서로 부딪히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도 거쳤다. 그 변화의 과정은 사회경제적 요소와 과학기술 및 문화적 요소가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져왔다.

농림부 농사원 교도국 홍보자료

근대화와 함께 찾아온 전통 부엌 개량

본래 한국의 부엌은 난방과 조리를 동시에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아궁이와 온돌이 하나의 세트로 작동하면서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아궁이에 장작과 나뭇가지 등으로 불을 붙이면 불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구들이 데워지고, 그때 아궁이에 솥을 걸어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들었다. 에너지원이 귀했던 한국으로서는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한국의 자연 생태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해서 만든, 조상들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결과였다. 그러나 근대화·서구화가 시작되면서 전통 가옥의 부엌은 개량 대상의 우선순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부엌을 개량하려면 사회기반시설이 갖춰져야 했고, 가옥 구조도 바뀌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후반에서야 도시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물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데까지는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런가 하면 연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도 도시에서는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반 가정에서 난방용과 조리용 열관리 시스템이 분리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부엌에서 주방으로

1970년대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 건축이 활발해지면서 현대식 주택의 붐을 맞게 되었다. 현대식 주거 양식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입식 생활을 전제로 하고, 부엌과 화장실이 집안으로 들어오며, 부엌은 다른 공간과 평면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서울은 물론이고 중소도시의 중심지에도 현대식 주거 양식을 갖춘 아파트가 속속 건립되었다. 공동 주택의 형태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아파트가 부동산 투자의 대상으로 올라서면서 그 인기는 더욱 높아갔다.

아파트의 부엌이 입식으로 바뀌자 그 명칭도 ‘주방’이나 ‘키친’과 같은 외래어가 등장했다. 부엌이 거실의 연장선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전통 가옥에서 사용하던 부엌, 정재, 정지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왠지 불편해진 것이다. 부엌과는 달리 주방이나 키친은 현대식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서구식의 키친처럼 주방은 집안의 다른 공간과 차단되지 않고, 가족원들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것은 현대생활에서 부엌이 차지하는 위치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엌의 이런 변화는 다른 사회적인 요인과도 연결된다. 과거에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면 으레 찬모, 식모, 가정부 등으로 불리던 보조 여성 노동자가 있어서 가사노동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서 노동 시장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가정부로 고용할 수 있는 여성 노동자의 수가 점차 감소되면서 주부들이 직접 부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부들은 부엌의 구조가 자신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극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런 사정과 맞물려 부엌과 내부의 주거공간이 생활에 편리하도록 설계된 아파트가 큰 인기를 얻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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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시스템키친으로

이후 현대의 부엌은 점차 초현대식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기능적이고 아름답게 꾸며졌다. 부엌이 시스템키친으로 변신하면서 각종 주방기구·기계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온갖 편리한 기구의 사용으로 음식 장만이 수월해져서 주부들이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또 주부들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부엌일을 나누어야 한다는 의식도 자라났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운운하던 구시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거의 없다. 가정 내 남녀 역할의 엄격한 구분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의 변화가 부엌의 기능과 상징적인 의미를 바꾼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부엌은 현대화를 향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상업주의가 그 변화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부엌의 현대화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엌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실천적 활동이 감지된다. 각자 자신들이 처한 위치에서 조금씩 개선을 도모했고, 때로는 제한적이지만, 일상의 전복을 꿈꿔 보기도 했다. 근현대를 살았던 우리 어머니들이 편리함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우리 딸들과 아들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글_함한희│전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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