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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어느 민속학자의 오디오 편력기

오디오1)는 음악의 민주화

에디슨의 3대 발명품을 축음기, 영사기, 전구라고 한다. 그가 1876년에 축음기를 발명하고, 1908년에 밀납보다 단단한 수지로 만든 원통형 4분짜리 앰버롤 실린더Amberol silinder를 개발하여 음악을 그런대로 들을 수 있는 축음기를 시판하였다.

음악은 실연하는 것을 직접 현장에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연주를 참관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양음악 클래식 곡들은 궁중이나 부호의 저택에서 연주하는 것을 상류층만 들었던 것이다. 옛날에 백성들은 명창의 노래를 좀체 듣기가 어려웠다.

20세기 오디오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음악을 듣게 되었다. 오디오는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에 연주되던 음악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극복한 것이다. 오디오는 20세기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맞추어 음악이 대량 유통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음악이 과학의 날개를 타고 향유층을 확산하게 되었다. 오디오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풍속도가 변하였다. 오디오는 예술의 대중화요, 음악의 민주화다.

하이파이Hi-Fi 오디오2)를 즐긴 자의 변명

오디오가 음악을 대중화하였다고 누구나 오디오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급 오디오는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비싸다. 실연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위하여 순도 높은 재료, 전기전자적 특성, 음향학적 구조, 공명역학적 상관성 등을 복합적으로 이용하며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런 과정에 많은 돈과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오디오 매니아는 사위로 삼지 말라는 경구가 나왔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여덟 식구의 가장인 내가 걸맞지 않게 오디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동안 심취한 적이 있었다. 널찍한 거실에 튼실한 MBL 시디플레이어3)를 통하여 나오는 소리를, FM Acoustics 프리앰프에서 중립적으로 조정한 뒤, KR Enterprise 파워앰프에서 윤기가 나게 증폭하여 육중한 ATC SMC 100 스피커로 묵직하게 음악을 연주하였다.4)

음악애호가들은 이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보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현대판 풍류객의 과소비로 여겼다. 이것은 민속연희를 전공하는 연구자가 필요한 도구로서 장만한 것이 아니다. 음원도 우리 연희나 국악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 CD가 1000장이 넘어도 국악 CD는 100장이 채 되지 않았다. 순전히 내 개인의 취미로 음악을 듣고 즐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죽어서 염라대왕이 나에게 이승에서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놓고 좋은 음악을 들었던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참고 참은 세월

처음부터 거창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참고 참다가 자식들의 학업이 마쳐진 환갑이 되어서 제자들의 성금이 바탕이 되어 하이파이 오디오를 시작하였다.

가족들은 나를 음치에 박자치라고 한다. 이런 면을 보상하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인지 나는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학생 때는 언감생심 라디오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50년대 말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들어간 셋방 주인이 쓰던, 본체보다 더 큰 건전지를 검은 고무줄로 감아서 쓰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양도받은 것이 내가 처음으로 산 음악 재생기기다. 그것으로 음악을 들으며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달래곤 했다.

그때 나는 통영오광대와 고성오광대의 채록 작업을 시작하였다. 연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기도 없던 때라 일일이 구술을 받아 적는 힘든 작업을 하였다. 1960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심의를 하기 위한 공연을 할 때 비로소 녹음기가 사용되었다. 가난한 교사로서는 음악 재생기기보다 민속 현장에서 사용할 녹음기와 카메라가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1965년 답사에서 쓸 휴대용 릴reel 녹음기를 처음으로 샀다. 그 뒤 워크맨 같은 카세트 테이프 녹음기를 10여대 구득하였지만, 음악 재생용이 아니라 구술을 녹음하고 그것을 옮겨 기록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1970년 초에 가서야 Philips 턴테이블 컴포넌트Component 오디오5)를 구하여 LP를 들었다.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음악전집을 사서 해설을 보면서 경도되었다. 그때 국산 음반의 질이 좋지 않았다. 미군이 출입하는 부산의 택사스촌이라는 유흥가 입구의 고물상을 뒤져 LP를 사기도 했다. 간혹 좋은 판을 발견하면 횡재하는 기분이었다.

1994년 일본 오사카대학 객원교수로 혼자 가 있을 때에 Onkyo 컴포넌트 오디오를 사서 들었는데, 오디오에 대한 갈증을 가시지 못했다. 이듬해 제자들이 내 환갑기념 논문집을 발간하고 증정식을 마친 뒤 대표가 찾아와 봉투를 내밀며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만 쓰시라” 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것으로 평생의 소망이던 하이파이 오디오를 구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연구실에 Quad 앰프와 Harbeth Compact 7 스피커를 들여놓았다. 65세에 정년을 하고 기기를 집으로 옮긴 뒤 조금씩 웃돈을 주고 바꿈질을 계속하면서 본격적인 하이파이 오디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도 오디오 매니아의 세계에서는 겨우 입문기를 벗어난 중하급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디오를 정리하고

2011년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집을 줄이게 되어 덩치가 큰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6)는 제자에게 양도를 하고, 옹색한 서재에서 북셸프 스피커7) JBL 4312에 귀를 기울이다가 ElacBS 403으로 바꾸었다. 공간이 좁아 아내가 TV 시청을 하지 않는 낮에만 틀기로 약속을 하고 오디오를 거실로 옮겼더니 음량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하이파이 오디오를 시작할 때 들었던 Harbeth Compact 7를 다시 들여놓았다. 마치 객지로 떠돌며 예쁜 여자들을 만나던 탕아가 늙어서 고향의 수더분한 본처에게 돌아와 안식을 찾은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고 있다.

컴포넌트 오디오

내 음악적 취향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바뀌어 갔다. 클래식으로 시작하여 명상적인 뉴에이지New age음악을 거쳐 제3세계 음악 위주의 신선한 월드 뮤직World Music을 듣다가 재즈Jazz의 깊은 맛을 음미하였다. 우리 가요도 들어 보니 좋아졌다. 흘러간 옛 트로트도 좋고 7080의 포크송도 좋다. 서울로 이사를 온 뒤, 있는 CD만 듣고 새로 사지 않기로 했다. 대신 Marantz 튜너tuner8)를 첨가하여 FM 음악 방송을 자주 들으며 새로운 음악을 접한다.

나는 취미로 오디오를 즐기면서도 근간에 민속학자로서 근성을 버리지 못하여 오디오 풍속도9)가 현대민속학의 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오디오 역사가 100년쯤 된다. 그동안 우리가 오디오를 어떻게 즐기면서 우리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풍요롭게 하였는가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1) 오디오(audio)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향 재생기기를 가리킨다.
2) 고음질의 음향을 재현하는 기기, 하이엔드(Hi-end) 오디오라고도 한다.
3) 통상 오디오 관련 글에는 품명을 그대로 쓰는 것 관례이고, 30년이 넘은 고물들이라 광고 효과도 나지 않을 것이라 익명으로 표시하지 않고 그대로 이름을 밝혀 썼다.
4) 오디오계에서는 오디오로 음악을 플레이(play)하는 것도 또 하나의 ‘연주’라고 생각한다.
5) 턴테이블, 시디플레이어, 앰프, 스피커 등이 분리된 오디오 시스템.
6) 세로로 길어 마루에 그대로 놓은 스피커, 소년의 키만큼 커서 ‘톨보이형 스피커’라고 한다.
7) 책장 선반에 놓을 만큼 작은 스피커를 일컫는 말이지만 제법 큰 것과 받침을 놓고 쓰는 것을 모두 다 가리킨다.
8) 라디오 수신 장치.
9) 사람이 오디오 기기를 활용하여 음악을 즐기는 삶의 양상을 말한다.

글_정상박│동아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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