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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촌댁! 봄을 줄게, 봄을 다오!

2019년 봄은 다른 해에 비해 겨울의 끝자락을 쉽게 털고 일어서는 듯하다. 극심한 한파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도 겪은 기억이 없는데 이미 봄기운이 온 천지를 덮기 시작했다. 박물관 마당에 나가니 소나무 아래 노란 복수초가 지표를 뚫고 나와 얼굴을 내밀었고, 명자나무 줄기 마디마디에는 빨강물을 가득 머금은 망울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그리고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조차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는 그늘의 원추리도 작년처럼 연녹색의 빳빳한 잎으로 땅을 뚫고 나와 있다.

 

이렇게 싹이 움트고 꽃망울이 터질 준비를 하는 박물관 마당 한가운데 봄을 온몸으로 격하게 반길 채비를 단단히 갖춘 한옥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오촌댁’이다. 저 아이를 만나러 가던 날도 봄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머릿속에 넣으면 저절로 눈이 감기고 시간은 냅다 뒷걸음질을 친다. 오촌댁을 핑계 삼아 난 마음으로 봄 여행을 떠나본다.

 

 

몇 해 전만 해도 한옥을 쫓아 전국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일이 일상이었다. 처음 만나 반가운 집도 있었고 보면 볼수록 마음 깊숙이 와서 안기는 집도 있으니 그게 한옥만이 뿜어낼 수 있는 힘이라 생각되었다. 이런 발걸음들은 심하게 계절을 타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겨울은 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따뜻한 봄이 오면 추위를 핑계로 움직이지 못한 날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심경에서 마음부터 바빠졌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 만났던 봄 한옥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집의 기둥이 되고 서까래가 된 저 나무들이 숲속에 살고 있을 때 함께 있었던 꽃들의 내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웃 땅에 뿌리를 맞대고 적어도 수십 년은 같은 공기와 물을 먹고 살았을 테니 서로에게 상대의 향과 색이 스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봄기운과 함께 한옥으로 향하던 수많은 여정 중 지금까지도 최고의 순간은 언제나 같은 장면이다. 오래된 한옥이 많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경상북도. 그러던 어느 날 그 언저리를 벗어나 보고자 안동에서 동쪽으로 뻗은 34번 국도로 방향을 잡았다. 34번 길의 동쪽 끝은 바다를 품은 영덕이고, 거기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한옥과 마을이 여럿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 늦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봄이 오는 소리, 영덕 복사꽃 전경 ⓒ영덕군
ⓒ최지현
ⓒ최지현

 

왜 난 그 길을 그제야 찾은 것일까? 아니 그때라도 가게 된 것이 다행이다. 영덕으로 접어들기 전 펼쳐져 있던 복숭아밭에서 내 인생 최고의 봄을 만났다. 달콤한 향을 뿜어내는 복사꽃이 눈발처럼 날리는 봄날의 이곳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그 아지랑이처럼 몽환적인 장면을 가슴에서 지우기 힘들 것이다. 하늘하늘 날리는 연분홍색의 꽃잎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투명한 향기까지. 그 후 나의 봄날 중 며칠은 어김없이 34번 국도 위에 있었다. 모퉁이를 돌면 어떻게 생긴 마을이 나오는지가 눈을 감고도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를 정도가 되었고 그 길을 지나 만나는 한옥들과도 친해져갔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박물관 마당에 들이기로 한 집을 영덕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오촌댁’이다. 우리에게 온 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2010년 오촌댁이 고향을 떠난 후 난 그곳을 여러 번 찾았지만 우연히도 모두가 봄이 아닌 다른 계절이었다. 마을에 들리면 동네 어른들께 ‘오촌댁은 서울에서 잘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면 오촌댁 마당에 서서 ‘고향 가서 잘 있다고 안부 전하고 왔다’며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올해는 복사꽃이 눈발처럼 날리는 봄날 꼭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2010년 오촌댁을 처음 만나러 가던 길을 떠올리면서. 내가 대신 그 꽃밭을 다녀와 160년을 넘는 시간 동안 그런 꽃향기를 맡으며 지낸 오촌댁에게 따스한 볕이 드는 대청에서 고향 봄소식을 소곤거려줘야 할까 보다. 고향의 봄이 그리운 이들이여. 올해는 오촌댁 마루에 앉아 그대들의 맘속에 남아 있는 봄에 안겨보심은 어떠실지?

 

 

글_박선주│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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