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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방앗간

자욱한 김 속에 통통한 가래떡이 뽀얀 자태를 뽐내고, ‘탈탈탈’ 고춧가루 빻는 기계 소리가 종일 들려오는 곳. 고소한 참깨 냄새가 골목길에 진동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 익숙하고 정겨운 풍경이지만 어느덧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되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곳이 방앗간이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도로변에 자리한 ‘문화방아’는 이 작은 시골 읍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남아 있는 방앗간이고, 음성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1964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무려 55년. 반백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 이곳의 김유숙 사장은 오래전 방앗간 집에 시집을 와 시부모의 뒤를 이어 지금껏 방앗간을 지키고 있다. 그이가 들려주는 방앗간 이야기.

 

Q. 문화방앗간은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방앗간이라고 들었다

김유숙_1976년 시집왔을 때는 국수랑 방앗간을 함께 하는 곳이었다. 국수가 맛있어서 장사가 제법 잘 됐는데, 80년대 들어서 기계로 국수 뽑는 집들이 많아지면서 국수보다는 방앗간 쪽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국수는 접고 방앗간 일만 하게 되었다.

 

 

Q. 1976년이면 43년 전이다. 시집와서 줄 곳 방앗간 일을 해왔나?

김유숙_친척 어른 중매로 방앗간집 아들과 맞선을 봤다. 당시엔 밥 굶지 않는 집에 시집가는 게 최고였고, 방앗간이니까 굶을 일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시집와서 시부모님께 일을 배우면서 남편과 줄곧 같이 일해왔다. 남편은 열세 살 때부터 방앗간 일을 도왔다고 했다. 40여 년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늘 가래떡 뽑고, 송편 빚고, 고춧가루 빻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Q. 예전에는 명절이면 정말 바빴다고 하던데, 명절 직후라 그런지 그리 바빠 보이지 않는다

김유숙_시대가 많이 변했다. 옛날에는 정말이지…(한숨). 설에는 가래떡, 추석에는 참기름 들기름 짜는 거랑 송편, 그리고 김장을 하는 가을이랑 고추장 담그는 봄에는 고춧가루 빻느라 일 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Q. 설날에 가래떡, 추석에 송편… 그 양이 얼마나 되었나?

김유숙_설 명절이 되면 열흘 정도는 잠도 못 자고 일을 했다. 가래떡만 쌀 백 가마 정도 했다. 요즘에는 참기름이 필요하면 한 말씩 짜서 먹는데, 옛날에는 추석 명절 전에 한 되, 두 되씩 가지고 오면 그걸 모아서 기름을 짜는데, 하루에 2홉짜리 병(작은 소주병 정도)으로 백 병을 만들었다. 그러니 명절 한번 쇠면 기름만 1천5백 병 정도 나왔다. 들깨는 빈대떡 부치려고, 참깨는 송편에 바르려고 필요했다. 지금 단위로 설명하면 8백 그램 정도 깨를 짜면 2홉짜리 한 병이 나온다. 그렇게 짜두면 방바닥에 그걸 놓아두고 잠 잘 자리가 없어 의자에서 자고 바닥에서 자고 그랬다.

 

Q. 옛날에 송편은 집에서 직접 빚었으니까 추석에 기름 짜는 일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김유숙_그렇다. 대신 송편을 빚으려면 떡방아를 빻아줘야지. 한창때는 여기 문에서부터 사람 줄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 서 있다가 자리에서 밀려날까 싶어 싸움도 많이 나고. 그러던 게 90년대부터 가정집에서 송편을 직접 빚지 않고 우리한테 주문하는 양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2004년경부터 갑자기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송편을 사가는 손님조차 많이 줄었다.

 

김유숙 씨는 43년 동안 방앗간 일을 해온 착한 손으로 틈틈이 수필도 쓴다

 

Q. 방앗간에 쌀가루를 가지고 가서 가래떡을 주문하는 이들도 많이 줄었겠다

김유숙_오랜 단골 할머니, 할아버지들 아니면 거의 없지 않겠나. 요즘 누가 명절이라고 그런 정성을 들이나. 먹을 사람도 없는데. 설이나 추석에도 서울에서 바쁘게 사는 자식들이 내려와 아침에 세배하고 나면 바로 올라간다. 예전처럼 이튿날까지 동네 어르신들한테 인사하고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동네 어르신들도 명절에 음식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

 

Q. 그래도 요즘엔 송편을 직접 빚는 경우가 드무니 추석에 송편 손님은 좀 있지 않을까?

김유숙_예전엔 추석 다가와 송편 빚으려면 잠도 못 잤다. 한창 할 때는 하루에 한 가마니씩 손으로 빚었다. 그때는 기계도 없지만 냉장고도 없을 때니, 그날그날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80킬로그램, 총 세 가마 정도를 만들었다. 요즘 종이 박스 크기로 30개 정도 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나이 들고 몸이 힘드니 송편 빚는 게 힘들어 거의 안 한다.

 

Q. 시대도 시대지만, 솜씨가 좋으니 장사가 잘 되지 않았겠나

김유숙_우리 가래떡은 옛날부터 맛있다고들 했다. 그래서 오랜 단골뿐만 아니라 서울로 이사 간 이들도 주문하고 그런다. 가래떡은 잘 못하면 식었을 때 고무줄처럼 되기 쉬운데, 우리 떡은 그렇지 않다고들 한다. 일종의 손맛인데, 물과 쌀의 비율을 잘 맞춰야 한다. 찌는 시간, 속도도 잘 맞춰야 하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게 기술이다. 그래서 나이 든 분들은 우리 집 떡이 옛날 쌀떡 맛이 제대로 난다고 한다.

 

 

Q. 명절이 가장 바빴던 때와 요즘 명절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가?

김유숙_80~90년대 한창 바빴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 명절 일은 옛날의 두 시간 분량 밖에 안 된다. 가래떡만 해도 예전에는 백 가마 하던 걸 요즘은 다섯 가마 정도밖에 안 하니까.

 

Q. 몸은 편해졌지만 서운한 마음도 들겠다

김유숙_서운하고 조금 가슴 아프기도 하다. 제사도 간소하게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명절 특유의 그 북적북적하고 들뜬 분위기가 사라져 가는 것은 조금 아쉽다.

 

Q. 명절에도 이 정도라면 평소엔 어느 정도인가?

김유숙_주문 있을 때, 그때그때 만드는 정도다. 다들 공장에서 만든 떡을 사먹지, 누가 방앗간에 쌀가루 가지고 와서 뽑아 먹겠나. 시대가 변했으니 당연한 거다. 지금은 자리를 지키는 데 의의를 둔다. 우리가 문을 닫으면 동네 오랜 단골 어르신들이 얼마나 서운하겠나. 이 나이에 일이 있는 것만으로 즐거움이고 복이라고 생각하며 일한다.

 

Q. 지금껏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그런 의미인가?

김유숙_옛날에는 동네 방앗간이 동네 사랑방이기도 했다. 우리 딸 말이 ‘하루에 커피 믹스 50개가 모자란다’고 했을 정도니까. 볼일이 없어도 삼삼오오 여기 모여 수다 떨고 가는 그런 정겨운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어르신들도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요양원 가 계신다. 젊은 사람들이야 떡만 딱 주문하지 이야기하다 가고 그러는 게 없으니까.

 

 

Q. 그런 모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겠다

김유숙_아무래도 허전하다. 하지만 아주 문을 닫고 안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하고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가 일터였다면 지금은 놀이터 같다. 쉬느니 나와서 우리 집만의 떡과 기름 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걸 주고, 여전히 오다가다 들리는 분들이 있으니 서로 반갑고. 그런 즐거움에 계속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참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 젊어서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이 이 방앗간이라고 생각한다.

 

Q. 최고의 유산이라는 소회가 인상 깊다

김유숙_아이들 한창 자랄 때 일은 너무 힘들고 남편은 서운하게 하고…. 그래서 시아버지에게 아이들과 나가서 살겠으니 방 하나 얻어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시아버지가 아랫목에 누워서 일단 자라고 하시더니 나가서 밥상을 차려 오셨다. 그 밥을 먹는데, 마음이 그냥 풀리더라. 세상에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아버지 밥상을 받아보겠나. 그때의 감사함, 따뜻한 마음에 감동해서 지금껏 살았다. 우리 고생하는 걸 봐서 아이들은 방앗간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하니 아쉽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몸이 허락하는 한 이 방앗간을 지키고 싶다.

 

 

글_편집팀
사진, 영상_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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