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명절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다

정월대보름 풍습은 다양하고 풍요롭다. 달맞이, 더위팔기, 쥐불놀이, 연날리기, 달집태우기, 오곡밥 먹기, 부럼 깨물기, 마른나물 먹기 등. 하나씩 살펴보면 실외 놀이거나 다소 소란스럽다.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대지와 한가했던 생활을 일시에 깨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겨울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다. 어둑해질 무렵, 동네 아이들과 논으로 몰려갔다. 여름이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곤 했던 냇가 근처 논이었다. 언제 만들었는지 남자아이들 손엔 철삿줄에 매달린 구멍 난 깡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우리가 논 한가운데 도착했을 때 이미 농악대의 풍물 소리가 요란했다. 짚과 나무를 세워 원뿔 모양으로 높게 쌓아놓은 게 보였다. 한쪽에는 음식과 술도 놓여 있고, 낯익은 동네 어른들도 보였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우리들은 풍물패의 장단과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들떠서 몰려다녔다.

 

제웅치기, 달집태우기 같은 정월대보름 풍습에는 여러 가지 발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눈이 한 곳으로 모이고 환호성이 터졌다. 쌓여있던 볏짚에 불이 붙으면서 허공으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꽃의 끝을 올려다보았을 때 하늘 한 켠에 보름달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의 열기 뒤편으로 보름달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을 빌었을까. 어린 나는 그날이 무슨 날인지 그 행사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다만 불길이 치솟은 불길 뒤로 보름달이 떠오르던 그 순간이 정지된 화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구멍 뚫린 깡통을 들고 갔던 사내아이들은 아마 밤새도록 쥐불놀이를 했을 것이다. 내가 봤던 게 달집태우기라는 건 먼 훗날 알았다.

 

달집은 보통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짓는다고 한다. 통대나무를 엮어 원뿔 모양 움막을 엮는다. 달집 속에는 섶이나 짚, 생솔가지, 통대나무를 넣는다. 달이 뜨는 동쪽은 터놓고 그 가운데에 새끼줄로 달 모양을 만들어 매어둔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글을 적어 함께 매달기도 한다.

달집을 만들어놓고 달이 뜨길 기다려야만 한다. 달이 뜨길 기다린다는 표현보다는 달을 맞이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윽고 산 위로 보름달이 보이면 쌓아올린 달집에 불을 붙인다. 서서히 떠오르던 달이 온전한 모습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소원을 빈다. 그해 액운이 든 사람은 저고리 동정에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를 붙여 함께 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특별히 바라는 것과 집안에 병든 가족이 있으면 사연을 종이에 적어 불태웠다. 달집태우기는 주로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행해졌다고 하니 논농사와 관계가 많은 듯하다.

 

정월대보름에 자기 나이대로 다리를 밟으면 그해에는 다리에 병이 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다.

 

요즈음엔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며 한 해의 안녕과 소원을 빌기도 하지만 예부터 발원의 대상은 달이었다. 그것도 꽉 찬 보름달이었다. 옛이야기 속에서도 보름달을 향한 기도와 소원을 이룬 원형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풍요와 넉넉함, 정화의 상징으로 달은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했다. 해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면 달은 바라볼 수 있으면서도 영험한 힘을 가졌다고 믿었던 것 같다. 설이 새로운 ‘해’를 기념하는 날이라면 정월대보름은 새해 들어 첫 번째로 맞이한 꽉 찬 ‘달’을 맞이하는 축제다.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며, 본격적인 농사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어쩌다 오곡밥과 나물을 못 먹고 정월대보름을 보내면 서운하다. 특별히 오곡밥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날씨 탓에 대보름을 보지 못하면 섭섭하다. 부럼으로 땅콩이라도 먹어야 여름을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남아 있는 정월대보름의 흔적들이다.

 

부인과 아이들이 달 맞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정월대보름을 맞이해서 올해도 각 지역마다 달집태우기 행사가 진행된다. 시대는 변했지만 넉넉하고 근심 없는 새해가 열리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소원을 달집 속에 태우며 한 해의 안녕과 무사를 빌어보는 것도 좋겠다. 먼 길을 달려가 달집태우기를 볼 수 없다면 마음속에 달집 하나를 만들어 태워도 될 것이다. 새로운 해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바빠서 준비 없이 맞이했다면 정월대보름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한 해를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 그런 의미로 정월대보름은 아직 우리에게 유효하다.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