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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저장소

쓸모없는 물건의 화려한 부활, 지승공예紙繩工藝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는 그 기원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주된 용도였겠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모자와 부채, 소품상자나 바구니, 심지어는 옷을 짓는 데까지도 활용될 정도로 다양한 생활용품 제작의 소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한지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일상 분야는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그것을 모아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한지는 기록을 위한 본디 소임을 다 한 것이지만 그것을 보관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경우에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물론 경우에 따라 한지의 뒷면을 활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먹이 배어들면 뒷면에 비치는 한지의 특성상 기록용으로 재활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거나 불쏘시개로 쓰기에는 한지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한지를 창조적으로 재활용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한지를 가늘게 찢은 뒤 꼬아 종이끈紙繩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엮어 다양한 생활도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생활용품의 제작법으로, 지금은 흔히 지승공예紙繩工藝라고 하지만 지승에 공예라는 말을 붙여 훗날 만들어진 용어이다.

 

다양한 제작방법, 다양한 쓰임새

지승을 사용하여 만든 생활용품은 매우 다양했다. 촘촘하게 엮어 형태를 만들거나 성글게 엮어 그물처럼 만드는 등 자유자재로 제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만들 수 있는 것도 필통이나 바구니와 같이 크기가 작은 물건은 물론이고 화살통이나 함, 심지어는 나무 뼈대 위에 감아 소반을 만들거나 항아리처럼 큰 물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능과 형태를 가진 물건들의 제작이 가능했다. 여기에 들기름을 먹여 방수 효과를 더하기도 하고, 옻칠을 하여 단단하게 형태를 잡거나 광택을 살리기도 하였다. 물론 옻칠은 국가가 규제하는 제작 기법이었기에 민간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승을 엮어 만든 바구니

 

지승을 활용한 제품의 의미는 단순히 버려지는 것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생활용품의 활용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자라처럼 생긴, 물이나 술을 담는 용기에 촘촘히 엮어 씌운 지승은 용기가 다른 물건과 부딪혀 깨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만들어 단 지승끈은 자라병의 운반과 이동의 편리성을 높여주고 있다.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는 찬합은 지승으로 엮어 씌운 그물망이 이동 중에 분리되어 내용물이 흩어지는 낭패를 막아준다.

 

지승을 엮어 감싼 자라병

 

지승망을 씌운 찬합

 

창조성과 활용성으로 엮어진 실용의 미

지승으로 만든 생활도구는 가는 종이끈을 엮어 제작하는 탓에 소요되는 시간도 많을뿐더러 정성을 필요로 한다. 쓰지 못하는 것의 쓰임새를 다시 창조하는 작업이기도 하며, 제작된 생활용품 대부분이 보임새도 미려하다. 실용과 조형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창조된 소소한 아름다움은 사용하면서 얹어진 손때로 완성도가 높아진다.

 

 

글_김창호│국립민속박물관 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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