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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발견

밤의 길잡이, 초롱

‘나는 암흑에서 빛으로 들어왔다.’ 근대 문명의 심장부에서 뱉은 민영익의 말이다. 미국에 사절로 간 그가 호텔 로비에 켜진 샹들리에chandelier에 놀라 납작 엎드린 것이 1883년의 일이다. 전깃불은 근대를 상징한다.

조선의 밤길을 안내한 길잡이는 단연 초롱提燈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손에 들린 불빛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달도 기운 으슥한 밤길을 헤매다 한줄기 불빛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을 떠올린다. 일몰 이후에는 등불이 햇빛을 대신하는 셈이다.

 

‘문만 여닫아도 꺼지고,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꺼졌다’고 한 이은상 시인의 호롱불처럼 등불은 바람과 상극이다. 불이 바깥나들이를 하는 조건은 실내와 전혀 다르다. 바람은 막되 빛은 투과해야 하니 여간 까다롭지 않다. 행여 꺼질까, 번질까 등불을 다루는 손길에 조심성이 잔뜩 묻어난다. 심지에서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틀을 구성하고, 들고 이동하기 쉽게 배려한 섬세한 내부 장치는 작지만 농축된 지혜의 소산이다.

 

초롱은 겉에 씌우는 천인 초롱의燭籠衣와 틀, 초꽂이, 고리, 나무 손잡이로 이뤄졌다

 

이런 여러 조건을 두루 충족한 기물이 바로 초롱이다. 초롱은 촛불로 밝히는 휴대용 등을 총칭한다. 손잡이가 달린 휴대용 제등提燈의 일종이다. 초롱의 종류는 매우 다채롭다. 얇은 비단인 깁으로 감싼 것에서 종이로 두른 것이 있고, 등롱도 대나무나 목재로 만든 것에서 철사로 얽은 것까지 여러 가지다. 『동국세시기』에는 등의 형태에 따라 각양각색의 이름이 등장한다. 수박등, 연꽃등, 칠성등, 가마등, 수복등, 태평등, 종등, 항아리등, 잉어등, 자라등… 그 수가 두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귀한 신분은 겉을 얇은 비단으로 싸고 속에 밀초를 켠 사초롱을 앞세우고, 환한 대낮에도 신분의 표징으로 삼았다. 정2-3품쯤이라야 허용되던 품등品燈은 등롱꾼의 손에 홍사초롱紅紗燭籠을 대신 들렸다. 붉은 깁으로 감싸 홍사초롱이다. 푸른 깁을 두른 청사초롱은 혼례식에 주로 썼다. 본디 왕세손이 쓰던 것이나 혼례식만큼은 서민에게도 허용했다. 노비의 혼례에도 사모관대에 활옷을 입힌 전례와 다를 바 없다.

 

 

서민을 위해 초롱을 새로 고안한 이는 성호 이익이었다. 비싼 밀초 대신 기름등잔을 쓰도록 구조를 바꾼 것이다. 요샛말로 공동선을 실천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인 셈이다. 조선 말기에는 깁 대신 유리를 끼워 불이 번지는 단점을 보완한 반면에 무게는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측면은 가벼운 오동나무를 쓰고, 들쇠를 다는 천판은 단단한 배나무를 쓴 것도 이런 탓이다. 소소한 초롱 한 점을 만드는 데도 농익은 경험칙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발끝을 비추는 조족등도 초롱의 일종이다. 빛을 확산시키는 초롱에 비해 조족등은 밑으로 뚫린 화창에 빛을 집중할 수 있었다. 순라군이 도둑의 얼굴에 비춘다 하여 ‘도적등’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내부의 이중 그네 장치는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리는 불 그릇의 균형을 잡아준 묘책이었다.

처마 끝이나 부엌에 거는 현등은 저녁을 지을 동안 장독과 우물을 오가는데 요긴했고, 조촉은 궁중의 정재 때 연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로 쓰였다. 붉은 비단을 둘러 긴 장대 끝에 매단 조촉은 멀리서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초롱을 들고 가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한 폴 자쿨레의 다색 목판화「눈 오는 밤」

 

종로에는 등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었다. 가게에는 형형색색의 등을 진열해놓아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늘날의 조명 가게를 연상케 한다. 양반가의 것은 장인이 만들었으나, 민간에서는 손수 솜씨를 발휘했다. 생활 기술로 빚은 것일수록 기발한 모양으로 개성이 넘쳤다. 초롱의 종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밤길을 나선 사연만큼 모양도 제각각이다.

 

초롱에는 칠흑의 어둠을 헤치고 종종걸음 하던 조선의 고단함이 배어있다. 동이 언제 틀지 알 길 없어 밤은 더욱 깊어 보였다. 어둠을 몰아내는 데는 천 번의 비질보다 한 줄기 빛이 더 유효한 법이다. 빛이란 이런 존재다. 조선의 밤길을 안내한 초롱이 근대의 여명을 열기까지 소임을 다한 셈이다.

 

 

최공호_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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