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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도감

여인의 발에 피는 꽃

전래 동화 ‘콩쥐팥쥐’에는 콩쥐가 잃어버린 꽃신 한 쪽을 주운 원님이 꽃신의 주인 콩쥐를 찾아 행복한 결실을 맺는 이야기가 나온다. 계모와 팥쥐의 갖은 구박으로 마을에서 벌어진 큰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던 콩쥐에게 홀연히 나타난 암소가 준 꽃신이 매개가 되었다. 콩쥐는 꽃신을 신고 잔치에 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꽃신의 주인을 알아본 훌륭한 배필을 만나 고난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다.

서양 동화 ‘신데렐라’에서도 왕자님은 자신이 주운 유리구두 한 쪽에 발이 꼭 맞는 신데렐라를 찾아 신부로 맞이한다.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은 팥쥐처럼 발이 너무 크고 못생겨서 작고 예쁜 신발에 맞지 않았다. 동서양을 아울러 귀하고 예쁜 신발은 착용하는 사람의 성품이 좋을 뿐만 아니라 고귀한 신분이라고 여겼다.

우리에게 귀하고 고운 신발은 ‘꽃신’이다. 꽃신은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나 양반집 마님이 신었던 당혜, 운혜, 수혜 등의 곱고 아름다운 여인의 신을 뜻한다. ‘비단신’이라고도 하였다. 동요 ‘오빠생각’의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는 가사 속 비단구두도 꽃신이다. 귀하고 고운 꽃신이기에 왕왕 순애보와 사랑을 대신하는 말로도 쓰인다. 혼례를 치룰 때 아름다운 신부가 신는 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꽃신’이라고 불렀던 당혜唐鞋

 

재미소설가 김용익(1920~1995)은 1956년 미국 「하퍼스 바자」매거진에 단편소설 ‘The Wedding Shoes’를 발표하였다. 미국 중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던 이 소설은 1963년 「현대문학」에 ‘꽃신’이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1978년에는 고영남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큰 인기를 모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靴鞋匠 황해봉은 몇몇 인터뷰에서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김용익씨의 소설이 히트하면서부터다.”(중앙일보 2012. 05. 17),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게임이 열렸던 80년대 후반 이전에는 수를 놓은 신이 많지 않았는데 차츰 수혜繡鞋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놓은 장인에게 부탁하여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갖신(가죽신)’이라 불렀다.”(이치헌 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2. 4. 5.)라고 하였다.

한국인에게 꽃신은 고운 여인의 모습이면서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꽃신은 최고의 신으로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드러내지만 완벽한 한 쌍으로서 꽃신의 짝은 남성에 의해 찾아 맞춰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때로는 친정에서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 버선발로 뛰어 나가거나, 신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날아오르는 문학적 표현 등이 전통적 유교관에서 자유로워진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꽃신’이라고 통칭되었던 운혜雲鞋

 

꽃신이 주는 다양한 의미의 바탕에는 조선시대 여인의 최고급 신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화혜장 황해봉의 인터뷰처럼 꽃신은 80년대 후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수놓은 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김용익의 소설처럼 조선중기 이후 일반 여인들이 많이 착용하고 선망하였던 비단신을 포괄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꽃신은 꽃 모양이나 여러 가지 빛깔로 곱게 꾸민 신발이며, 꽃당혜의 잘못된 말이라고 하였다. 또한 같은 사전에서 꽃은 인기가 많거나 아름다운 여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므로 꽃신은 최고의 아름다운 여인의 신을 일컫는다 할 것이다.

 

복식사 학계에서는 꽃신이라는 우리말 대신 당혜唐鞋, 운혜雲鞋, 수혜繡鞋와 같은 한자어 명칭을 사용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 문헌기록에 근거하여 신의 명칭을 부르기 때문이다.

꽃신은 ‘혜’라고 불리는 신목이 없는 신이다. 전통 신은 형태에 따라 혜와 화로 크게 구분되는데, 신목의 유무가 기준이 된다. 신목은 발목부터 종아리를 감싸는 부분으로 현대의 부츠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혜는 전통사회에서 석, 구 그리고 이 라는 다른 용어로도 쓰였는데, 조선시대 이후에 혜라고 정착되었다. 반면 신목이 있는 신을 ‘화’라고 한다. 관복을 입을 때 착용하는 남자의 신이 화에 해당된다. 현대 결혼식 폐백에 신랑이 사모관대와 함께 착용하는 신이 화의 일종인 목화木靴이다. 신을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이라고 하는 것도 신의 구분과 명칭에서 연유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판화에는 꽃신이 곧잘 등장한다

 

전통 신은 용도에 따라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마른신과 진신이 있다. 당혜, 운혜, 수혜 등 꽃신은 모두 마른신이다. 마른신은 날씨가 갠 날, 좋은 날 신는 신이라는 뜻이다. 가죽으로 밑창을 만들고, 비단을 신의 양쪽 가에 대어 발등까지 올라오는 신의 울타리 즉, 신울을 만든 신이 마른신이자 꽃신이다. 마른신의 반대 개념은 진신인데, 눈비 오는 궂은 날 신는 신을 뜻한다. 진신은 물이 스며들지 않게 가죽을 기름에 절여 사용한다. 궂은 날, 보다 효과적으로 물기를 피하기 위해 밑창에 징을 박았다고 하여 징신이라고도 한다. 기름에 절인 가죽을 사용한다고 하여 유혜油鞋라고도 불린다.

신을 만든 재료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 비단으로 만든 신, 나무로 만든 신, 풀로 만든 신, 놋쇠로 만든 신, 종이로 만든 신 등이 있다. 꽃신은 비단으로 만든 신이다.

 

꽃신은 마른신이고 비단신이며, 신목이 없어 날렵하고 고운 혜의 일종이다. 그 중에서 당혜와 운혜는 앞코와 뒤축에 장식한 무늬에 따라 이름이 부쳐졌다. 당혜는 최고급 신으로 앞코와 뒤축에 당초문을 넣었다. 원래 ‘당(唐)’ 자는 당나라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일컫는 매김말로 중국식 또는 이국적인 스타일이라는 뜻이 있고, 최고급의 의미가 내포된다. 운혜에 비해 앞코 부분이 좀 더 도톰하고 뭉툭하다. 조선시대 당혜는 왕실과 양반가 여인만이 착용할 수 있는 최고급 신이었다. 특히 왕실에서 주로 착용되었고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졌다. 유물로 남아있는 영왕비英王妃, 1901~1989의 당혜는 은실로 모란문을 넣어 짠 홍색 비단으로 신울을 만들었다. 또 다른 영왕비 당혜 역시 금실로 모란문을 넣어 짠 비단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꽃신들

 

운혜는 앞코와 뒤축에 구름문이 새겨졌다. 앞코에 있는 문양을 죽엽竹葉이라고 하고, 뒤축에 있는 무늬를 굼벵이라고도 하나 구름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당혜에 비해 앞코가 날렵한 제비부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제비부리신’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울에 사용된 비단은 주로 화초문花草紋을 이용하였다. 운혜는 조선시대 일반 여인의 혼례복으로 공주의 녹원삼과 함께 착용이 허락되었고, 딸이 혼기를 앞둔 집에서는 운혜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혼수품을 적은 ‘물목단자’에는 운혜가 당연히 기록되어 있다.

 

운혜는 신부의 아름다운 신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갔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의 판화 작품 ‘Korean Bride(1919)’에는 연두색 비단으로 신울을 만들고 홍색 비단으로 앞코를 덧댄 운혜가 곱게 놓여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한 일반 여염집에서도 혼례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운혜를 신는 경우가 많아졌다. 운혜는 조선 여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1920년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고무신의 형태가 운혜와 유사한 것은 이러한 여인의 열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수를 놓아 만든 수혜는 주로 무용신으로 착용되었다. 조선의 문헌에는 ‘수초혜繡草鞋’, ‘홍수혜紅繡鞋’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꽃신과 다르다. 화혜장 황해봉의 말처럼 수를 놓은 꽃신은 근래 정착되었다. 운혜에 구름문을 대신해 꽃을 수놓은 모습이다.

 

다양한 꽃신들

 

일흔 번이 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는 꽃신에는 우리의 정서와 감정이 온전히 녹아 있다. 꽃신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신이었고, 첫사랑의 추억이 되며, 소중한 징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꽃신의 형태는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고유 모습과 닮아있다. 꽃신의 앞코는 기와의 처마 끝, 저고리의 섶코와 닮았고, 버선코를 보둠을 수 있다. 혹자는 한국인의 콧날을 넘지 않는다고도 한다. 유려한 옆선은 저고리의 도련과 흐름이 같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꽃신은 단절된 과거가 되었다. 혼수품이던 한복마저 대여하여 입으면서 꽃신은 웨딩슈즈의 자리마저 내주었다. 꽃신에 담긴 고귀하고 아름다운 의미마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꽃신의 매력은 부드러운 옆선과 날렵한 신발코에 있죠. 신기 불편해 보이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 모양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변합니다. 신이 사람의 발 모양에 맞춰지는 거죠.”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황해봉. 중앙일보 2012. 05. 17. 인터뷰 기사 )

 

현대인은 꽃신을 대신해 고가의 명품신을 산다. 백화점 쇼윈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가의 하이힐이 꽃신의 깊은 감성까지 대신해 줄 리 없다. 신이 사람의 발모양에 맞춰지며 자연스럽게 담아냈던 개개인의 모습을 불편한 하이힐에 발을 맞춰 신는 현대인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빠르고 편리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그래도 가끔은 꽃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조선희 글, 『화혜장: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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