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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가을에는 가을을 듣겠어요

봄만 되면 각종 음원 차트에 어김없이 올라오는 노래 ‘벚꽃엔딩’. 하도 어김이 없어서 ‘봄 캐롤’이라 칭하게 된 이 노래를 사람들은 올 봄에도 어김없이 듣고 흥얼거렸으며 내년 봄에도 그럴 것이다. 한데 왜 봄 캐롤만 있고 가을 캐롤은 없을까. 봄은 생각만 해도 노래가 절로 나오는데 가을은 왠지 묵언 수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계절감 때문일까. 불러 보려 해도 딱히 떠오르는 가을 대표곡이 없다. 적어도 요즘엔.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는 가을 명곡들

시간을 거슬러 70~80년대 대중가요사를 되짚어보면 제철 맞아 그물 가득 걸려 올라오는 가을 전어 떼처럼 아주 맞춤한 가을 노래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가사 때문에 해마다 10월이면 전파 타기 바빴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은 그리 오랜 기억도 아니다. 가을을 노래한 곡을 유난히 많이 불러 ‘가을의 연인’이라는 애칭까지 얻은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그 시절 사랑의 아픔에 빠진 숱한 남녀의 인생 노래 한 자락이 되기도 했다. 이뿐이겠는가.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다섯손가락의 ‘사라진 가을’, 방미의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그리고 1960년대까지 올라가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번안한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까지 가을 명곡들은 넘쳐난다.

 

가사를 일부러 외운 적도 없는데 노래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두세 마디 이상은 무리 없이 따라 부르게 되는 신묘한 힘을 지닌 노래들. 선선히 불기 시작하는 가을 바람에 실려 라디오에서, 레코드 가게에서 연신 흘러나오던 그 노래들은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전령사였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가을판 ‘벚꽃엔딩’이 참 많기도 했던 거다.

 

 

가을에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그렇다고 이제 감성 가득한 발라드 음원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한데 좀처럼 가사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예전 가을 노래들의 가사는 꽤 문학적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 쉽게 빠져들었다.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동명 영화의 주제가로 발표돼 그해 최헌에게 가수왕 타이틀을 선사했던 ‘가을비 우산 속에’는 사랑을 떠나보낸 이의 눈물과 아픔을 ‘가을비 우산 속에 맺히는 이슬’이라고 표현했다. 문학적 알레고리이면서도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이 가사 한 마디에 사람들은 가을비보다 더 촉촉이 젖어들곤 했다. 지금처럼 즐길 거리, 놀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 시절 노래 한 마디는 사람들에게 실연의 상처를 버틸 쓴 소주 한 잔이었고, 쓸쓸함을 여며줄 따뜻한 외투 한 벌이었다.

 

아예 유명 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김민기의 ‘가을 편지’라는 곡도 있었다. 가을 노래의 대명사가 된 이 노래를 들으며 연인에게 친구에게 또는 잊고 있었던 누군가에게 새삼스러운 편지 한 장 적어 보내기도 했다. 편지 봉투에 예쁘게 물든 단풍잎이나 책갈피에 넣어 빳빳하게 말린 낙엽 한 장 넣는 운치와 낭만도 있었다. 요즘이야 미화원들만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 쓰레기가 돼버린 낙엽이지만 그땐, 그랬다.

 

 

라디오,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나만의 가을 노래 콜렉션

노래가 곧 삶의 희로애락이던 아날로그의 시대. 요즘은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 하나 들고 몇 번의 터치만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찾아 들을 수 있지만 당시 원하는 음악을 원할 때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음반을 구입하는 것. 다른 하나는 FM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방법이다. 시간도 걸리고 타이밍을 못 맞춰 DJ 멘트가 섞여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공 들여 테이프 하나를 다 채우고 나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가을 노래 콜렉션’이 탄생했다. 그렇게 만든 테이프에 손 글씨로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을 정성껏 적어 친구나 연인에게 선물했던 기억. 실시간 노래 신청을 할 수 있는 SNS 대신 정성스럽게 신청곡과 사연을 적은 엽서를 보냈으며, 며칠을 기다린 끝에 사연이 소개되고 신청곡이 나오면 그게 또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이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곡이 나올 때 놓치지 않고 녹음하려면 행운과 순발력이 필요했다.

 

그 시절 라디오 애청자였다면 ‘MBC FM 예쁜 엽서전’을 기억할 것이다. 평범한 엽서를 예술 작품 수준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했던 예쁜 엽서 공모전. 가을만 되면 단풍잎 고이 오려 붙이는 건 기본, 갈색 물감을 묻힌 칫솔을 손가락으로 튕겨 오묘한 질감의 낙엽 모양을 만들기도 하며 밤새 가을 분위기 물씬한 엽서를 만들었던 청춘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엽서에 어떤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보내야 방송에 나올까 고심도 했지만 그래도 가을은 사연 맞춤형 노래들이 오히려 많아서 고민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아프거나 설레거나 외로운 모든 순간에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가을 캐롤이 한두 곡이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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