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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도감

서민의 발, 짚신의 미덕

짚신은 한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어보라’는 인디언 속담이나 ‘신기료장수가 신발 주인의 직업을 알아챈다’는 우리네 경험칙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체중을 온몸으로 떠받치다보니 거기에 고단한 노동의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든 탓이다.

온몸을 낮추는 겸손함에다 흔한 재료로 제 소임을 다하는 품성은 양반의 갖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짚신만큼 애틋한 신발이 또 있을까? 대다수 서민들은 이것 없이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으니 짚신만큼은 겉치레로 가치를 따질 계제가 아닌 것이다.

짚신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신라 토기에 표현된 짚신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전형이 일찍 정착되었다. 짚신은 비구, 초리, 초혜로도 불렸다. 지푸라기로 엮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짚신은 보통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아 날줄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올을 삼는다. 여성용은 총이 곱고 앞부리의 엄지총에 물을 들여 꾸미기도 했다. 같은 짚신이라도 밀도의 차이가 뚜렷하다. 일상용은 촘촘히 삼을수록 좋지만, 상주가 신는 엄짚신은 총을 느슨하게 결어서 짐짓 죄인의 처지를 나타내었다.

짚신은 지푸라기뿐만 아니라 삼끈이나 칡넝쿨, 부들, 왕골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재료에 따라 삼치신, 청올치신, 부들짚신, 왕골짚신 등으로 이름이 달랐다. 이 가운데 삼이나 부들, 왕골을 가늘게 꼬아 촘촘히 삼은 신은 사치품이었다. 마른신으로는 손색이 없는 짚신도 궂은날에는 버선발을 적시기 예사였다. 양반이야 기름 먹인 갖신에 징까지 박은 진신을 가졌으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서민의 집에도 나막신을 몇 벌 갖추어둔 연유가 여기 있었다.

짚신을 삼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재료가 손에 닿는 서민 대다수는 자신이 손수 엮어 신었고, 농한기에는 오일장에 내어 가용을 삼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대중적인 신발이다 보니 특별한 기술 없는 서민들이 생계를 이을 직업으로 이만한 것도 드물었다. 이처럼 수요층이 두텁다보니 짚신에 얽힌 화젯거리도 차고 넘친다. 짚신으로 큰 재산을 일군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밤낮으로 삼은 짚신으로 재산이 수만 냥을 헤아리는 부자가 된 송씨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는 큰돈을 선뜻 내었다니 참으로 가상한 미담이다. 『백범일지』에는 감옥에서 삼은 ‘옥치’ 이야기가 있다. 옥바라지를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죄수가 수감 중에 짚신을 삼아 스스로 끼니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옥졸의 인솔 아래 시장에 나가 스스로 삼은 짚신을 파는 장면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짚신에 얽힌 이야기가 때로는 외국인에게 미치기도 한다. 1920년대에 내한한 독일 신부 베버는 자신의 책에 짚신을 자세히 소개했다. “가볍고 편해서 도보여행에 좋고, 특히 자갈투성이 험한 산길에 제격이다. 가볍고 잘 미끄러지지도 않는다.” 그는 특히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료 신부가 서양 신발을 고집하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웅덩이에 빠진 사실에 빗댄 듯하다.

짚신에 얽힌 일화가 이처럼 다채롭고 풍성하다. 유독 곡진하고 찰진 서사가 넘쳐난다. 짚신이 그만큼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일 터이다. 내로라하는 국내외 명품 신발에게 이런 미덕 한 자락인들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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