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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그 많던 가요제는 어디로 갔을까?

노래는 혼자 부르기도 하지만 여럿이 모여서 부르면 더 흥겹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모으면 그게 바로 축제가 됐다. 음악 축제를 통해 어떤 사상이나 세계관이 선언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1968년 8월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때 미국에서는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기치가 드높았다. 저항적인 음악인들이 뉴욕주 우드스톡 근처에 뭉치자 미국 전역에서 4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모여 들어 3일 동안 ‘사랑과 평화’를 노래했다.

 

가요제는 축제이자 ‘선발대회’였다. 가수들이 모여 대중과 심사위원을 앞에 두고 ‘누가 노래를 더 잘 하는지’를 가렸다. 스웨덴의 아바를 배출한 유럽 최고最古, 최대 가요제인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와 ‘볼라레’ ‘마음은 집시’ ‘노노레타’ ‘케사라’ 같은 명곡들이 발표된 ‘산레모 가요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이런 가요제에서 히트곡이 나오면 이용복이나 조용필 같은 당대 인기 가수가 번안곡으로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해외 유명 가요제에서 수상한 곡을 번안해 발표하는 것은 일종의 ‘장르’였다.

 

1975년 정훈희가 칠레국제가요제에서 ‘무인도’로 3관왕에 오르고 해외 가요제가 인기를 이어가자 문화방송(MBC)은 1977년 한국 최초 창작곡 경연대회인 ‘서울가요제’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나중에 ‘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을 바꾸고 지위를 더 높였다. 하지만 대중이 더 열광한 건 문화방송이 같은 해 개최한 또 다른 가요제였다. 많은 후속 가요제를 낳으며 수십 년간 한국의 대중음악을 이끈 원동력을 제공한 그 대회는 바로 ‘대학가요제’였다.

 

대학가요제로 시작된 가요제의 전성시대

‘명랑한 대학 풍토 조성과 건전 가요 발굴.’ 1977년 9월, 문화방송이 밝힌 대학가요제 개최의 취지는 이랬다. 대중음악의 흐름으로 보면 방송사가 대학생들의 창작곡으로 가요제를 개최한다는 것은 트로트 중심의 성인 가요와 함께 젊은이들의 포크,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서울, 전남, 제주 등 각 지구 대표가 뜨거운 경합을 펼친 끝에 ‘나 어떡해’를 부른 서울대 농대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스가 그랑프리를 받았다. 동상을 받은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역시 끊임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 되었다.

 

방송국 주최 가요제는 생중계나 녹화로 방송되었으며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첫 번째 대회의 성공은 대학가요제가 2012년까지 지속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된 화려한 신호탄이었다. 젊은 아마추어 음악인의 풋풋함, 신선함, 순수함 그리고 패기와 열정은 훈련으로 능숙해진 프로의 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들이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한 시점과도 맞아떨어졌다.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 벗님들, 노사연, 주병진(개그맨), 김학래, 조하문, 우순실, 김장수, 조갑경, 원미연, 유열, 이정석, 이규석, 이재성, 이무송, 장철웅, 김성호, 신해철, 전유나, 주병선, 김경호, 김동률, 이한철, Ex. 대학가요제를 통해 스타가 되고 음악인으로 남아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수들은 이렇게 많다.

 

해변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가세

1970년대 문화방송과 동양방송(TBC)은 ‘민영방송 라이벌’이었다. 문화방송 주최 대학가요제의 성공에 자극 받은 동양방송은 다음해인 1978년 7월, 연포해수욕장에서 ‘제1회 해변가요제’를 개최했다. 후발 주자였지만 히트곡 수로는 해변가요제가 대학가요제를 눌렀다. 특히 밴드들이 대거 등장해 ‘캠퍼스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한양대 혼성 보컬 그룹 징검다리의 ‘여름’이 대상, 홍익대 밴드 블랙 테트라의 ‘구름과 나’가 우수상, 항공대 밴드 런웨이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가 동상,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이 장려상,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가 인기상을 받았다. 모두 아직까지 ‘7080 세대’의 사랑을 받는 곡들이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가요제를 여는 것은 무리가 있어 해변가요제는 ‘젊은이의 가요제’로 이름을 바꿨다.

 

나중에 ‘강변가요제’가 된 MBC FM의 ‘강변축제’는 해변가요제를 대신해 야외 여름 가요제의 상징이 되었다. 1979년 청평 유원지에서 처음 개최된 이 가요제는 여름, 야외, 청춘, 음악이라는 요소가 맞아떨어지면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22회 대회까지 이어지며 많은 신인 가수들을 배출했다. 19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대상을 탄 이선희가 대표적인 경우다. 건아들, 홍삼트리오, 주현미, 박미경, 유미리, 송시현, 이상은, 이상우, 박선주, 이재영, 진시몬, 육각수, 유리(‘쿨’ 멤버), 신연아(‘빅마마’ 멤버), 이영현(‘빅마마’ 멤버), 김현성, 박혜경, 장윤정 등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가수들은 숱하게 많다.

 

197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까지 가요제는 한국 대중음악을 빛낸 수많은 가수를 배출했다.

 

그 많던 가요제는 어디로 갔을까?

요절한 가수 유재하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위의 가요제와는 성격이 살짝 다르다. 유재하처럼 작곡과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조규찬, 고찬용, 강현민, 유희열, 나원주, 심현보, 방시혁, 김연우, 루시드폴, 스윗 소로우, 오지은 등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28회 대회까지 이어오며 한국 대중음악에 없어서는 안 될, 실력과 감성을 겸비한 뮤지션을 배출하고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가요제들의 ‘화양연화’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것이다. 하지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제외하고 이 가요제들은 모두 사라졌다. 2018년 현재 존재감 있는 가요제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화려한 데뷔를 위해 훈련 받은 프로급 가수 지망생들이 가요제 무대를 이용하면서 가요제만의 신선함이 사라지고, 그와 함께 시청률도 떨어졌다. 가수 지망생들 역시 가요제 대신 ‘기획사’로 몰렸다. 시청자들은 가요제 대신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신인 아이돌을 내 손으로 뽑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가요제의 자취와 공헌은 크다. 여름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서 ‘이번에는 누가 대상을 탈까?’ 궁금해 하며 가요제를 봤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요제를 통해 탄생한 곡들은 여전히 우리를 흥겹게 하고 상처를 달래고 추억에 잠기게 해준다. 사라지되 아름답게 머물 수도 있다. 축제와 음악과 여름과 청춘의 공통점 아닐까?

 

 

글_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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