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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발견

과거의 소리를 듣는다

1896년 우리나라 사람의 목소리가 처음 레코드에 담겼다. 미국으로 건너간 조선의 노동자가 부른 노래다. 당시 첨단 발명품이었던 에디슨 원통형 레코드의 용도를 넓히기 위해 미국의 문화인류학자가 남긴 녹음이다.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목소리를 담은 첫 번째 원통형 축음기 기록물로 남았다.

 

한 5년 전쯤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국인이 최초로 녹음한 그 원통형 실린더가 서울에서 공개 실연된 일이다. 정말 궁금했다. 많은 이들이 모였고 에디슨식 축음기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상상해보시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나 역시 귀신의 소리를 들어봤을 리 없다. 음성이 담긴 원통 호일을 실린더에 끼워 바늘을 얹으니 소리가 흘러나왔다. 잡음 섞인 소리는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람의 목소리가 맞긴 한데 노래를 부르는 듯 했다. 아마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이럴 게다. 백 년도 훨씬 더 지난 원시형 기계의 음질을 따지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당시의 음성을 듣게 된 감동이면 족하다. 시간을 딛고 살아남은 기록물들은 하나 같이 버릴 게 없다.

 

뚜껑이 있는 케이스 안에 축음기용 원통형 레코드가 들어 있는 ‘에디슨 골드 몰디드 레코드’

 

말하는 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는 기계로

축음기는 1877년 에디슨에 의해 발명되었다. 에디슨은 자신의 축음기가 지닌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음성을 기록하기 위해 말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생각했을 뿐이다. 더 큰 가능성을 담은 음악의 상품화는 엉뚱한 경쟁자들의 몫으로 돌려줬다. 정작 자신은 전구의 개발에 힘을 쏟아 축음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에디슨의 원통형 음반은 경쟁자들이 소리가 더 좋은 원반형 디스크로 개량시켰다.

 

축음기는 음악을 담아 즐겨도 될 만큼 쓸 만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계를 만든 사람이 있으면 보급에 관심 갖는 이들도 있다. 맥락의 연결이 중요하다. 같은 물건을 음악에 적용시킬 아이디어를 낸 이들이 영리했다. 축음기는 음악을 담아 사람에게 들려주는 장치로 갈 길을 정한다. 이어 노래를 담아 파는 음반이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 축음기 역사의 월드 스타는 이탈리아의 가수 엔리코 카루소다. 하도 목청이 커서 커다란 깔때기 앞에서 노래하면 연결된 바늘로 직접 녹음 원반을 새겼다는 인물이다. 카루소는 당시 한 타이틀의 음반으로 100만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한 최초의 밀리언셀러이기도 하다.

 

 

축음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시기는 구한말 고종 때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힘깨나 쓰는 이들의 ‘잇 아이템It item’으로 등극한다. 능력 과시의 수단으로 축음기만한 물건은 드물었다. 저절로 시대를 앞서는 문화인임을 드러내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남들이 알지 못하고 갖지 못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음악 감상의 시공간 제약을 넘다

축음기는 기술 진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SPStandard Play를 거쳐 LPLong Play로, 수동 태엽 시기를 거쳐 모터로 원반을 돌리는 자동화가 내용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축음기는 음악의 대량 보급과 소비를 이끌었다. 연주장을 찾는 사람과 축음기로 음악을 듣는 사람의 숫자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모두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온전히 축음기 덕분이다.

 

 

축음기는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하고 성능 차이도 크다. 사진에서 보는 축음기들은 가정용으로 크기가 작다. 공공장소에서 쓰기 위한 대형 축음기도 만들어졌다. 나팔은 소리골의 진동을 물리적으로 증폭시켜 큰 소리를 내게 했다. 나팔의 형상과 크기에 따라 축음기의 소리가 달라진다. 소리 결을 중시한다면 나팔 혼의 개구면적과 재질의 매끄러움이 돋보이는 걸 골라야 한다. 화려한 나팔꽃이나 류트 형으로 멋을 낸 나팔을 달면 축음기는 장식용 오브제로 손색없다. 휴대용으로 써도 될 만큼 작은 축음기도 나와 야외에서 음악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을 머금은 축음기의 아우라

축음기의 최고 명품이라 할 ‘크레덴짜’를 들어봤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가 담긴 SP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는 깜짝 놀랄 만했다. 제법 큰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량이 쏟아진다. 음질도 생각보다 좋다. 전기 확성을 하지 않아 음의 왜곡이 없는 순수한 느낌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여전히 축음기 애호가들이 있는 이유를 실감했다.

 

 

최근 축음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너무 빨리 바뀌는 디지털 시대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선택이다. 아니라면 아날로그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감성주의자들의 장식 아이템으로 각광받는다. 이를 겨냥한 수입업자들의 대처도 발 빠르다. 골동의 가치를 감안해도 생각보다 값도 비싸지 않다. 시간을 머금은 과거의 물건이 풍기는 아우라를 즐기는 맛도 괜찮다. 작동이 되는 것을 골라야 제대로 선택한 것이다. 여분의 바늘도 챙기고 SP 음반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없다면 지금부터 하나 둘 모으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가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물건의 원형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알려주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축음기는 삶의 덧없음을 위안시키는 출발의 원형으로 자리매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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