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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도감

지혜와 쓸모, 그리고 차이: 치마

에피소드 1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공중파에서 생방송하던 때가 있었다. 누가 그 해의 최고 미인으로 뽑힐까, 국민들의 관심이 적잖은 시절이었다. 마지막으로 뽑힌 진은 으레 번쩍이는 왕관에 서양 드레스를 입고 행진했다. 그래도 명색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이고 보니 후보들이 갈아입은 수많은 옷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한복도 있었다. 그들이 입은 한복은 서양 드레스 못지않게 화려했다. 그 한복이 내심 부러웠던 건 넓고 풍성한, 부채꼴처럼 퍼진 치마 때문이기도 했다. 옷장 속 내 한복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니!

 

에피소드 2
‘하후상박(下厚上薄)’이라 했다. 한껏 부풀어 항아리처럼 둥근 치마, 그 위에 좁고 밀착되는 저고리 입은 여인이 서있는 모습을 그렇게 불렀다. 누군가는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이라 칭찬했고 다른 누군가는 옷 따위 아랑곳 않고 그저 화가의 필선과 기법에만 집중했다. 어찌되었거나, 관심사가 무엇이든, 심지어 그 차림새가 편한지조차 알 수 없지만 눈에 보이는 선이 곱디고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게다가 「미인도」 아닌가! 어쩐지 하후상박이란 표현과 치마, 저고리가 만든 선의 흐름이 절묘했다.

 

작자 미상_풍속화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미상_풍속화 부분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지런한 주름 속에 숨은 지혜

본래 한복 치마는 필요한 길이만큼 맞춰 자른 옷감을 그대로 이어 붙여 만든다. 아래, 위로 긴 직사각형 여러 개를 옆으로 잇고 또 잇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만든 치마폭은 보자기와 다를 바 없이 전형적인 평면이다. 지극히 무난하고 볼품없는 평면이 몸에 잘 맞는 치마로 변신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주름’ 덕분이다.

 

치마말기 아래 가지런히 쌓인 주름은 평면으로부터 입체를 구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가 된다. 여러 개의 주름이 모이면 밋밋한 치마폭이 둥근 몸을 타고 자연스럽게 돌아 감싸는 유연함을 얻을 수 있다. 치맛자락 안에 갖춰 입은 갖가지 속옷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으나 주름으로부터 비롯한 유연함과 입체감이 「미인도」의 항아리 모양 실루엣을 만든 근원이라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니 미스코리아의 치마에도, 「미인도」 속 그녀의 치마에도 분명 주름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치마는 어쩐지 전혀 다른 실루엣을 그려낸 듯 보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치마 재단법

 

서로 다른 재단법에 담긴 차이

뜻밖에도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한복 치마지만 재단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 「미인도」 속 미인의 치마는 치마폭의 윗부분에만 주름을 잡은 탓에 가운데가 볼록하지만 치맛단은 그대로인지라 항아리처럼 둥근, 하후상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그 주름을 모두 풀어 펼치면 그녀의 치마는 정직한 직사각형 옷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연회복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한복 치마는 가늘고 긴 시각적 대비, 특별한 때에 입는 옷이라는 역할에 걸맞게 조금 더 화려해야 했고 그만큼의 부피감을 필요로 했다. 재단할 때 각각의 치마폭 윗부분을 삼각형으로 잘라낸 건 그 때문이었다. 모든 치마폭을 사다리꼴로 잘라 연결한 셈. 그러니 치맛단은 풍성하고 그에 비해 말기 아래 주름 분량은 줄어들었다. 자연히 가늘고 긴 데다 치마폭마저 활짝 퍼진 A자 실루엣이 오롯이 드러났다. 치마의 변화는, 결국 한복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작자 미상_풍속화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약용_『하피첩』_국립민속박물관

 

온전한 치마폭에 남은 쓸모

항아리처럼 둥근 실루엣, 「미인도」 속 치마를 다시 본다. 옛사람들의 생활, 삶의 방식이 그러했듯 어느 한 곳 잘라내지 않고 온전히 잇는 것은 옷감을 아끼는 방법이자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지혜였다. 옷감 귀하고 무엇이든 아껴 써야 할 시절이었으니 굳이 멀쩡한 것을 잘라서 재단해야 할 이유가 없고 빨래할 때 뜯어서 다시 지어야 하니 그만큼 늘리고 줄이는 일도 수월했을 것이다. 때로 이불이 필요하거나 옷감이 절실할 때 치마를 뜯어 쓴 것 역시 무관하지 않으리라.

 

온갖 치마를 늘어놓고 바라보다 뜬금없이 『하피첩霞帔帖』을 떠올렸다. 귀양 간 정약용에게 아내가 보낸 붉은 치마. 낡고 바래 노을빛에 가까웠다던 그 치마를 잘라 글을 쓰고 묶은 책. 만약 사다리꼴로 재단한 치마였더라면 반듯하게 잘라 글을 남길 수 있었으려나. 『하피첩』을 보며 참으로 가당찮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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