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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조선에도 슈퍼 히어로가 있었을까?

최근 마블의 영화 「블랙 팬서」가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는 희귀 금속 ‘비브라늄’을 생산하는 나라 와칸다의 왕이 슈퍼 히어로인 블랙 팬서가 되어 악당들로부터 비브라늄을 지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블은 아이언맨 · 캡틴 아메리카 · 토르 · 헐크 · 스파이더맨 · 블랙 팬서 등 다양한 슈퍼 히어로의 모험담을 쏟아내고 있으며, 이에 답해 대중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열광하고 있다. 이런 슈퍼 히어로 신드롬은 비단 현대의 우리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과거 이 땅에도 시대 상황에 따라 대중이 희구하던 영웅상은 존재했고, 그에 대한 영웅담이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의 슈퍼 히어로가 주로 디지털 매체를 통해 등장한다면, 조선시대의 영웅들은 당시 사람들이 접근하기 용이한 소설을 통해 나타났다. 영웅 소설은 영웅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비현실적인 내용을 가미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시대상이 소설의 배경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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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서 때로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여전히 맹활약하고 있다.
전우치, 도술로 탐관오리를 통쾌하게 응징하다

조선시대 소설 속 대표적인 영웅으로 먼저 ‘전우치田禹治’를 꼽을 수 있다. 전우치는 도술을 익혀1)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등 유명세를 탔던 실존 인물이었다.2) 이 전우치의 행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 소설화된 작품이 바로 『전우치전田禹治傳』이다. 소설에서 전우치는 하늘의 관리로 변장해 왕에게 황금 들보를 요구하고 그 황금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는가 하면, 조정에서 체포령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탐악한 관리들을 응징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한다. 수탈을 자행하는 지도층에 울분이 쌓여있었던 백성들은 이렇게 도술을 부리며 그들을 골탕 먹이는 전우치를 통해 큰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전우치전』은 도가사상이 유행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더 각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우치가 살았던 16세기는 사화士禍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에서 벗어나 재야에 은둔하며 현실의 돌파구로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 받던 사회적 약자들의 꿈을 이뤄준 홍길동

또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도 큰 인기를 누렸다. 홍길동은 연산군 대에 활약한 도적이었는데, 허균許筠, 1569~1618에 의해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3) 실존 홍길동은 관원 복장을 하고 무리지어 관아를 습격하곤 했는데,4) 소설 속 홍길동도 가난한 백성들을 살려준다는 뜻의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해 탐관오리를 물리치는 등 유사하게 묘사돼 있다. 소설에서 홍길동이 도적이 된 이유는 서얼의 설움 때문이었다. “소인이 평생 서러운 바는 대감 정기로 당당한 남자가 되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홍길동이 말한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함은 단적인 사례일 뿐이며,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신분적 한계로 차별받는 부당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소설은 홍길동이 율도국을 세워 그곳의 왕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홍길동은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차별 받았던 모든 약자들의 대변인이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는 존재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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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은 16세기 이후 한국인과 함께 해온 소설 주인공이자 슈퍼 히어로다.

 

원더우먼 이전에 박씨 부인이 있었다

조선시대 소설 속에는 여성 영웅도 있었다. 『박씨전朴氏傳』의 박씨 부인이 그 주인공이다. 박씨 부인은 추녀에서 절세미인으로 탈바꿈한 뒤, 병자호란 중에 초인적인 능력으로 청나라 장수들을 물리치는 슈퍼우먼으로 그려져 있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으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하고 참담한 패배 의식에 빠지게 되면서 백성들은 자존심의 회복을 열망했고, 이것을 소설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해소했던 것이다. 특히 박씨 부인 앞에서 청나라 장수들이 무릎 꿇고 항복한 장면은 현실에서 당한 치욕과 분노를 짜릿하게 갚아주었다. 이러한 통쾌함으로 박씨 부인은 조선시대 여성 영웅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조선시대 영웅 소설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영웅의 등장을 희구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편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영웅 소설은 손으로 베낀 필사본 이외에 활자본 등 다양한 판본으로 전해져 왔다. 특히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파급 효과가 더 컸는지, 상업 출판 방식인 방각본으로도 남아 있어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시공을 초월하여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영웅은 우리들의 끝없는 관심 대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늘 영웅이 고프다.

 

1)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68권,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상
2) 이기李墍, 「송와잡설松窩雜說」, 『대동야승大東野乘
3) 이식李植, 『택당집澤堂集』 제15권, 「잡저雜著」, 산록散錄
4) 『연산군일기』 1500년(연산군 6) 12월 29일

 

 

글_윤혜민 |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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