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현장일지

연평도, 조기의 섬에서 꽃게의 섬으로

 

조기·선원·돈이
넘쳐나던 시절의 연평도

 

– 화장실에 종이가 없으면 돈으로 닦았다.
– 잘 때 돈주머니를 베개 삼아 잤다.
–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
– 아이들도 조기를 들고 다니며 빵을 바꿔먹었다.
– 연평도 어업조합 일일출납고가 한국은행 일일 출납고보다 많았다.
–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 하지 황해도 도지사 안 한다.
– 연평도에 물이 마르면 말랐지 내 주머니 돈이 마르랴 (연평도 나나니 타령 중)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평바다에 어얼싸 돈바람이 분다 (군밤타령 중)
–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황금 바다 연평바다로 돈 실러가세 (연평도 배치기 소리 중)

 

한 때 조기잡이로 돈이 넘쳐나던 시절의 연평도를 표현하는 말이다. 50년~60년대 조기잡이 선원 생활을 하던 연평도 주민들은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라는 말로 조기가 넘쳐나던 시절을 회상한다. 4월과 5월이면 연평어장은 조기로 가득 찼고, 조기 울음소리에 선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회유성 어류인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 해역과 남중국해역에서 겨울을 나고, 조도2월, 흑산도2월~3월, 칠산‧녹도4월, 연평도4월말~6월초, 대화6월~7월 순으로 북상한다. 4월말에서 6월초까지 조기를 따라 상륙한 조기잡이 어선들은 연평도 해안을 가득 메웠다. 조기를 잡아 온 배와 조기를 육지로 수송하기 위한 운송선 간에 바다 위에서 조기가 거래되는 파시波市를 형성 하였다. 작은 섬에 수많은 선원이 모여듦에 따라 숙박시설, 음식점, 생필품과 어선에 필요한 선구를 파는 상점 등과 술과 웃음을 파는 각종 유흥시설이 형성되어 파시촌이 임시로 형성되었다. 파시촌은 연평도뿐만 아니라 조기가 북상하는 길목인 흑산도, 위도, 녹도 등에도 형성되었다. “어부는 조기떼를 따르고, 철새들술집 여자들은 어부떼를 따른다.”라는 말이 조기파시의 광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hibit_img15

연평도 조기파시시절에 대해 설명하는 95세의 정진섭 노인

정진섭1923년생에 따르면 조기파시 때의 광경은 지금의 명동 거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 앞 파시 골목길에 대면 지금 명동 거리는 거리도 아입니다. 사람에 치여서 걸어 다니지를 못해요. 지금 명동 거리는 그때 연평도에 대면 아무것도 아이지. 그때 유곽이 돈을 참 많이 벌었어.”

정진섭은 95세의 고령임에도 일제강점기와 마지막 파시가 있었던 1968년까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연평도 조기파시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매년 4월말부터 6월초까지 50일 동안 조기파시가 서면 유곽이 200여 곳에 이르렀고, 철새라 부르던 작부가 많을 때에는 700명~800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일본인 기생을 데리고 와서 술을 팔았다. 일본인 기생, 평양 기생, 전라도 기생, 경상도 기생, 충청도 기생이 많았다. 대체로 지역마다 구역이 분리 되어 있었고, 선원들은 주로 자기 지방의 색주가를 찾았다. 선원들을 쟁탈하기 위한 상인들 간의 갈등이 심했다. 특히 일본인 상인과 전라도 상인들이 패싸움을 자주 했다.

선원들이 현금을 베개 삼을 정도로 돈을 많이 가지고 다녔다. 이 돈을 빼먹기 위해서 색시들이 술을 잔뜩 먹이고 술값을 옴팡 뒤집어씌우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조기파시를 그때는 서로 속이고 속는 작사판作詐이라고 했다. 선원들은 배 위에서 숙식을 하고, 밤에 뭍으로 나와서 색시들이 있는 술집에서 술도 마시고, 밤새도록 노름을 했다. 파시촌은 밤마다 술판, 노름판, 싸움판이 벌어지는 작사판이었다.

매일 밤 흥청거리던 파시촌의 유흥은 임질, 매독 등 성병을 불러왔다. 성병에 걸린 선원과 술집 여자들이 보건소에 줄을 섰다. 성병에 걸리면 606호 주사를 맞았는데 주사도 통하지 않으면 아랫도리를 이불로 덮고 수은 연기를 쐬는 민간요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daily_sl01_171127
daily_sl02_171127
daily_sl03_171127

이처럼 조기 파시가 열렸던 50일 동안 연평도는 밤낮으로 흥청거렸다. “사흘 벌어 한 달 먹고, 한 달 벌어 1년 먹는다”는 말은 조기 파시가 성행한 시절의 연평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조기떼를 따라 연평어장을 찾는 어선과 상선이 많게는 5천여 척에 달했고, 연평어장에 동원된 선원이 연인원 9만 명에 달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연평어장의 활황은 1968년 5월 26일을 마지막으로 조기파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조기로 가득 찼던 연평어장의 추억은 50여 년 전의 아득한 추억일 뿐이다. 이제는 노인들의 기억과 대중가요의 한 구절로 회상되고 있다.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눈물의 연평도〉 중에서

 

꽃게의 섬으로
되살아난 연평도

 

조기잡이 어선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연평도에서 조기가 어획되지 않자 1960년대 후반부터는 지주식 김양식을 시작하여 일본으로 수출을 하였다. 그러나 호남과 충남 해안 등에서 대대적인 부류식 김양식이 확산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꽃게가 많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 연평도는 꽃게잡이의 섬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연평도는 닻자망 23척대연평도 17척, 소연평도 6척, 안강망 6척대연평도 4척, 소연평도 2척 통발 5척대연평도 4척, 소연평도 1척 등 꽃게를 어획하는 선박이 총 34척이다. 4월에서 6월은 봄 꽃게잡이, 9월에서 11월은 가을 꽃게잡이로 연평도는 그 어느 어촌보다 활기가 넘친다. 나머지 기간은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꽃게 어획을 금하고 있다.

연평도는 북한과 인접하여 주변 해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야간 조업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꽃게잡이 어선은 일출 이후부터 일몰 직전까지 조업이 가능하다.

2016년도는 연평도 꽃게 어획 역사상 최고의 해였다. 위판 실적을 기준으로 1,365톤, 어획고 146억 원이었다. 이는 위판실적일 뿐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양을 포함하면 2배 이상의 어획고를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꽃게를 어획하면 인천으로 직행하여 위판 되기도 하지만 연평도 내에 산재한 냉동실에 보관하기도 한다. 냉동창고에 보관된 꽃게는 공식적인 어획량에 잡히지 않는다.

exhibit_img15

닻자망에 걸린 꽃게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 주민들

 

연평도 주민들에게 꽃게 어획이 미치는 경제적인 영향력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꽃게를 어획하는 닻자망, 안강망, 통발 어선 등 30여 척에 승선하는 선원들 대부분은 육지 사람들이다. 봄, 가을 꽃게잡이 시기에 200여 명의 선원이 연평도에서 생활하지만 선주들이 마련한 컨테이너를 개조한 숙소 등에서 생활하고, 식사도 별도로 마련한 공간에서 먹는다. 따라서 성어기에 선원들이 연평도에 입도하더라도 식당, 숙박시설이 특별히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꽃게가 많이 잡히면 주민들이 동원되어 꽃게 따기 작업을 하여 일당을 번다. 이마저도 2017년 가을 어획기에는 중국인 부녀자 60여 명이 연평도에 입도하여 꽃게 따기 일에 투입되어 주민들의 일자리가 그만큼 줄었다.
연평도는 조기의 섬에서 꽃게의 섬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조기파시를 경험했던 노인들은 그 시절의 화려했던 연평도를 잊지 못하고 있다.

글_김창일│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