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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출가외인도 친정에 갈 수 있었을까?

추석은 풍성함과 무르익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그러한 이미지를 오롯이 대변한다. 그렇게 좋은 날이기에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재회의 날이 되기도 한다. 추석 연휴를 앞두면 전국의 고속도로가 귀성 차량으로 메워지는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이러한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가족들의 만남이 대규모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취업이 되지 않아서, 혼기가 찼는데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사업이 여의치 않아서, 가족이나 친척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추석의 만남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런 스트레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핵가족의 시대에 남편, 자녀와 오순도순 살다가 부담스럽기만 한 ‘시월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일 것이다.

 

친정부모의 생신·제사·추석에
친정에 방문할 수 있었던 근친覲親

 

물론 며느리에게 추석이라는 명절이 스트레스의 대상으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며느리는 또한 친정 부모의 사랑스러운 딸이기도 하기 때문에 추석을 맞아 시댁에만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친정에도 가게 마련이다. 시댁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며느리였던 그들은 친정에 가는 순간 스트레스를 주는 시누이로 변신한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단지 친정에서는 편히 쉬고 시댁에서는 온갖 시중을 다 들어야 하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호주제도 없어지고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친정과 시댁은 딸과 며느리들의 정신세계에 정반대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이것은 남편들에게도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본가에서는 자칫 부모와 형제들 편에서 부인을 ‘억압’하는 존재가 되기 쉽지만, 처가에 가서는 본인도 ‘씨암탉’으로 환대를 받으며 부인과 함께 ‘해방’을 맛보곤 한다. 문제는 대개 친정(처가)에 머무는 시간은 적고 시댁(본가)에서 ‘봉사’해야 하는 시간은 길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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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그 시절에도 추석만 되면 사람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가 친지들과 상봉하고 함께 성묘하며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눴을까? 그 시절의 며느리들도 추석만 다가오면 시댁 식구들 뒤치다꺼리할 생각에 우울증을 앓고 심할 경우에는 남편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다가 소박을 맞곤 했을까? 일단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오늘날과 같은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농촌 공동체 중심으로 돌아가던 그 시절에는 이미 평상시에 대가족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귀성의 필요성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며느리는 시집을 가는 순간부터 ‘시월드’에 들어가 살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큰 스트레스에 시달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자가 시집가면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라는 무서운 관습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굳이 ‘시댁 스트레스’를 말하자면 그것은 특별히 명절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연중무휴의 스트레스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명절 때 특별히 이동할 일이 없었다면 친정을 찾아가 친정 부모를 뵙는 일조차 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시집가면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평소에는 친정에 가 볼 엄두조차 못 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추석과 같은 명절에나마 친정 부모님, 특히 그리운 어머니를 만날 기회를 얻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마저 귀향의 기회가 없다면 그야말로 평생 시댁에만 갇혀 살다가 죽으라는 얘기니 얼마나 잔인한 노릇인가?

경직도 8폭 병풍, 여인이 길쌈하는 모습과 나들이를 가는 모습이 그려짐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다행히 조선도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던지 친정 부모의 생신이나 제사, 그리고 농번기가 끝난 추석에는 시부모로부터 말미를 얻어 시집간 딸이 친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 가리켜 ‘근친覲親’이라 했다. 근친은 말 그대로 친정 부모를 뵈러 간다는 뜻인데, 출가외인出嫁外人인 딸이 잠시 친정에 가는 것이라 하룻밤 자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처럼 흔치 않은 기회인데도 만약 시집가서 3년 안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근친을 하지 못하게 되면 액이 끼었다고 해서 평생 근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속설마저 있었다. 따라서 며느리들은 추석이 다가오면 더더욱 조바심을 내며 시댁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하루에 반절, 중간에서 친정부모를
만날 수 있었던 ‘반보기’

 

추석 명절이 오면 지금처럼 햅쌀로 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차례를 지낸 다음 그 음식의 일부를 싸서 근친에 나선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는 사돈에게 보낼 선물로 버선이나 옷을 지어 며느리에게 들려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마련한 선물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친정에 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며느리는 다시 친정에서 마련한 떡과 술을 챙겨 시댁으로 돌아간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렇게 추석 명절날 며느리가 들고 가는 떡을 ‘차반’이라고 불렀다.

근친을 가더라도 친정에서 자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사정이 생겨 일찍 출발할 수 없거나 아예 친정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근친이 어려웠다. 그럴 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반보기’이다. 반보기는 말 그대로 하루의 절반 동안만 친정 부모를 만나는 것으로 ‘중로상봉’이니 ‘중로보기’니 하고 불리기도 했다. 친정 부모와 미리 상의해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에서 딸과 친정부모가 만나 음식과 정을 나누다 돌아가는 것이다. 반보기를 할 때는 대개 친정부모가 다 나오는 경우는 없고 친정어머니만 나와서 딸과 애틋한 상봉을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하곤 했다. 만약 시댁과 친정의 사이가 돈독하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함께 반보기를 나가 사돈끼리 만남을 갖기도 했다.

 

‘노견의 회상’에 수록된 반보기 풍습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오늘날에는 교통도 발달하고 조선 시대의 남존여비 풍습도 사라져 애틋한 반보기 풍습은 그야말로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사실 반보기를 초래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조선시대 500년에 걸쳐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 중기인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가 혼인하면 여자가 시댁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의 친정에 들어가 사는 사례가 더 많았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 하는 이 같은 방식은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온 우리 민족 고유의 혼인 풍습이었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오죽헌도 신사임당의 친정에 있는 별채였다. 시집살이를 하던 신사임당이 근친을 나섰다가 친정에서 출산한 것이 아니라 혼인한 뒤에도 계속해서 친정에서 살다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이처럼 결혼한 뒤에도 친정 부모를 모시며 친정집에서 사는데 근친의 풍습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오히려 간간이 짬을 내어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일이 ‘비교적 수월한’ 며느리의 도리가 아니었을까?

만약 오늘날의 명절 스트레스가 조선 시대의 며느리들이 연중무휴로 겪어야 했던 ‘시월드’ 스트레스의 연장이라면, 그것은 여성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여성이 출가외인 취급을 받고 시댁에 종속되어야 했던 가족제도는 우리 역사에서 기껏해야 2, 3백 년 동안만 통용된 특수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 사회는 그 특수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로부터 벗어나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가족 제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 양자를 넘어서 좀 더 개인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족제도로 이행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모쪼록 그러한 이행과 더불어 가족이란 이름 아래 풍족하고 즐거워야 할 추석 명절이 누군가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일은 영원히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글_강응천 | 문사철 대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하고,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 시각에서 풀어주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적, 보편적 시각에서 자리매김하는 책을 쓰고 만들어왔다. 저서로는 『문명 속으로 뛰어든 그리스 신들』, 『세계사 신문』, 『역사가 흐르는 강 한강』, 『청소년을 위한 라이벌 세계사』,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등이 있고, 만든 책으로 『한국생활사박물관』, 『한국사탐험대』, 『즐거운 역사체험 어린이박물관』, 『국사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등이 있다. 현재 출판기획 문사철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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