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로, 누구나 죽으면 상여를 타고 길었던 이승의 여정을 끝냈다. 사회적 지위 및 부에 따라 상여의 크기와 모양, 장식물은 달랐지만, 이승을 떠나는 자와 이를 함께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천도薦度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이관호 민속연구과장에게 상여에 대해 들어봤다.
만들어진 상여
상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대사회부터 고인돌이나 옹관 등 장례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 등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상여와는 형태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시신을 운반하던 도구가 일찍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여에 대한 기록은 12세기 주희朱熹, 1130~1200가 쓴 『가례家禮』에 실린 ‘상여지도喪轝之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여는 신분이나 지역, 종교적 관념에 따라 형태가 다양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크기에 따라 대여大輿와 소여小輿로 나뉘었는데, 크기나 층, 장식 등은 망자 또는 상주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왕족이나 양반, 부잣집 등에서는 남연군 상여나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처럼 개인적으로 화려하게 제작하여 사용했습니다. 반면 일반 서민들의 경우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매하여 함께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상여계를 조직해서 가가호호 돈을 각출하여 상여 구입을 위한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사대부士大夫‧서인庶人 등에 따라 상여 장식물이 달랐다. 상여장식은 매우 다양했는데, 동물상 중에서는 죽은 이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와 보호의 역할을 하는 용龍을 상여의 앞‧뒷머리를 장식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했다. 봉황 역시 같은 의미로 머리장식 또는 측면과 전면에 그림으로 그려 장식했다. 인물상은 상여장식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특별히 ‘꼭두’라고 불렀다. 남자와 여자, 동자와 선인, 광대 등 다양한 인물이 장식으로 만들어졌다.
“여인과 동자, 동녀상은 죽은 이를 저승으로 모시는 공양供養의 형태가 많았습니다. 남자상의 경우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서 있거나 청노새, 청마 등을 타고 있는데, 이는 죽은 이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호랑이를 타고 있는 남자상은 신선이나 염라대왕, 저승사자 등 선인仙人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쁜 것들과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죠. 이밖에 ‘희광이’ 또는 ‘망나니’라 하여 잡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상을 상여 앞뒤에 만들어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상들은 저승 가는 길을 화려한 행차로 장식하며, 죽은 이를 호위하고 천도하여 극락세계로 이끌기 위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상설 3전시관에는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상여山淸全州崔氏古靈宅喪輿’가 전시되어 있다. 1856년철종 7년에 제작된 것으로, 전주 최씨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21대손인 최필주崔必周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상여다. 대단한 부자였던 최필주가 죽음에 이르자 맏아들이 경남 통영의 조각공을 초청하여 만든 것으로, 6개월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를 경남 진주에 있는 진주화단친목회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다가 1994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여 수리를 거쳐 1996년 2월 6일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상여는 4층 누각의 기와집 형태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긴 멜대 위에 4층 기와집 형태의 몸체가 조성되고, 맨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한 넓은 천이 쳐있습니다. 1, 2층 아래 부분에는 난간을 두르고 그 위에 인물조각상을 세웠는데, 망자가 외롭지 않게 저승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과 저승길을 인도하는 신선으로 알려진 동방삭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3층 지붕 아래에 연꽃이 시들어가는 과정을 조각한 것이 흥미로운데요.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보는 듯 서글퍼집니다.”
현재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 상여는 이관호 민속연구과장과 깊은 인연이 있다. 직접 상여를 기증받고 운반해온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진주화단친목회에서 기증전화를 받고 동기인 김시덕 과장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과 함께 5톤 트럭을 빌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진주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상여를 마주한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에 먼지가 가득 쌓인 상여를 마주한 것이다.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을 그리 꺼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여에 손을 데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였습니다.(웃음) 실제 사용을 안 하다 보니 보관만 해 오셨던 거죠. 벌레가 기어 나오고, 천이 바스러질 정도로 낡아있어서 상여를 가져갈지 말지 고민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있는 물건이니 가져가 보자라고 결심하고 차에 싣고 왔습니다.”
기증절차를 밟은 후 김시덕 과장이 주도적으로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천막과 채를 다시 제작하고, 망가져 있던 조각들도 보수했다. 단청의 색도 다시 칠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현재의 상여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만약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창고에 보관만 된 채 언젠가 버려져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을 상여였지만, 기증과 보수작업을 통해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국내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보는 유물 중 하나가 이 상여일 것입니다. 화려함과 상징성이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증 받을 당시,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그대로 두고 왔다면 지금처럼 박물관에 전시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합니다.(웃음)”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
상여는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상여를 메고 무덤까지 운반하는 상여꾼들은 일반적으로 13~25명으로 조선시대에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사라진 후에는 보통 젊은 사람들이 메게 되었다. 이들은 상여를 메고 가며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며 망자와 그의 가족들의 슬픔을 대신했다.
“상여꾼들은 상여를 메고 힘을 합쳐 무덤까지 운반하면서 ‘상여소리’를 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소’와 같이 의미가 있는 사설을 선소리꾼이 먼저 부르면 ‘오호 오호 오호 능차 오호~’와 같은 후렴을 부르는 선후창방식이죠. 이는 죽은 자와 산 자를 하나로 묶어주면서 장례의식을 성스럽게 하고, 망자의 가족과 친지들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이와 함께 호상 시에는 출상 전날에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그 위에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나 상주를 태워 노래와 춤으로 여흥을 하는 ‘상여놀이’도 있었습니다. 유족들의 비통함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이기도 했지만,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의지가 담겨있는 예능이었죠. 저희 할아버지가 장수하셨는데 상여놀이 때 상여에 타셨던 기억이 납니다.”
상여는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세계까지 운반해줄 뿐만 아니라, 상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 이승과 저승에 대한 관념 등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운반도구다. 특히 장식품, 관련 풍습, 노래, 놀이 등 상여와 관련된 내용으로 볼 때 종합예술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상여꾼들은 상여를 메고 옮기며 망자의 집이나 농사짓던 곳을 지날 때 못 지나간다고 버티며 술과 안주, 돈, 쌀 등을 상주에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아 마을에 어렵게 사는 이들을 구휼해줬습니다. 상여는 시신을 옮기는 도구라는 인식 때문에 아직까지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상여의 의미,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화를 살펴본다면 상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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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르신의 죽음으로 마을은 온통 떠들석 잔치라도 난듯하여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다 상여가 나가는 소리에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게만 바라보았더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제가 어릴적 본 상여는 하얗고 커다른 꽃송이가 수도 없이 달려있던 하얀 상여가 그려지는데 사진의 보여지는 상여는 정말 섬세하고 화려하네요.
아이들이 묻더군요.”상여가 뭐에요” 이글과 사진 보여주며 여렴풋 남아있는 저의 기억을 이야기 해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민속박물관을 올해 여름방학에 아이들과 2시간을 대중교통 도전해서 처음으로 방문했었어요.경복궁 문화학교를 참여하려고 새벽부터 달려갔었는데 피곤함과 더위까지 힘들었는데 경복궁돌고 더위피할곳이 바고 민속박물관이 있더라구요..거기서 한참을 아이들이 쌍륙놀이를 즐기고 왔었던게 기억이 남네요.
전시가 언제까지인지는 모르나 다시 꼭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