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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추천

위철 학예연구사가 추천하는
<영산회상이 수록된 휴대용 거문고 악보>

조선시대 선비가 갖추어야 할 교양 가운데서 음악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선비라면 서재에 거문고를 마련해 두었다가 공부를 하는 중간중간 휴식을 위해 연주를 하곤 했다. 거문고 연주는 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으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담소를 나누는 선비들의 풍류 중 하나였다. 이때 가장 즐겨 연주되었던 음악은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으로, 18세기 중인들에게까지 거문고연주가 널리 퍼지면서 이 곡이 수록된 휴대용 거문고 악보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위철 학예연구사에게 영산회상이 수록된 휴대용 거문고 악보에 대해 들어봤다.

 

양반들의 우아한 취미와
애호가들의 탄생

 

영산회상은 원래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이라는 가사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영취산에서 석가가 보살들에게 법화경을 설경한 이야기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래 불교 성악곡이었지만 16세기 이후부터 점차 기악곡으로 변해 전해졌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세조 때 음악을 정리한 ‘대악후보1759년, 영조 35년’에 실려 있는 것이 대표적이지만, 영산회상이 과거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학후보는 궁정에서 만들어진 악보이지만, 과연 영산회상이 궁정에서 처음 생겨났을까는 의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궁정음악이 민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만 애초에 민간에서 유행했던 악곡이 궁정에서 악보로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지요. 18~19세기에 영산회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 연주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리코더를 배울 때 ‘학교 종이 땡땡땡’을 연주하듯이, 거문고를 연주할 때 가장 대표적인 곡이 영산회상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악곡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초보자, 전문가 가릴 것 없이 즐겨 연주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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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은 ‘현악영산회상’, ‘평조회상’, ‘관악영산회상’ 등 세 종류로 나누어지며, 거문고를 비롯하여 가야금, 대금, 해금 등 다양한 악기로 연주가 가능하다. 이중 일반적으로 영산회상이라고 하면 현악영산회상을 말하며, 거문고가 중심이 된다 하여 거문고회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전기는 시를 짓고 읊는 시회詩會가 유행했던 시기로, 양반들에게 거문고연주란 여가이자 풍류이며 수신修身의 일환이었다.

“당시에 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경제적 여유와 시간도 있어야 했습니다. 풍류란 이런 것을 다 갖춘 양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죠. 조선후기가 되면서 지식과 부를 쌓은 중인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급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듯 중인들도 양반들의 고급문화인 풍류를 즐기고 싶어 한 것이죠. 이들은 처음 악기를 배우면서 거문고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거문고를 타고 연주하며 비슷한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거문고 연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수는 굉장히 늘어났다. 조선후기에는 극소수의 양반들이 즐기던 고급문화를 중인들도 누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애호가들도 점점 많아졌고, 반직업 수준으로 거문고 연주를 즐기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아주 좋은, 우아한 여가활동으로 인지했다. 조선전기도 마찬가지지만 시를 얼마나 잘 짓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울려서 음악이란 매개체를 가지고 여가를 즐기는 것을 더욱 중요시했다.

“조선 전기와 달라진 점은 조금 더 마니아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을 짓는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것이었죠.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거문고 연주를 잘하고 싶은 마니아적 기질이 발휘되었고, 남들보다 잘하게 되면 전문가인 것 마냥 행세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휴대용 거문고 악보를 들고
풍류방을 누비다

 

18세기 이후부터 19세기에는 거문고 악보가 수백, 수천 종 제작되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만들어진 악보는 영산회상이다. 악보는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휴대할 수 있도록 병풍을 접듯이 접첩으로 작게 만들어졌다. 도포자락에 쏙 넣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악보들은 아마추어들이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굳이 악보가 필요 없지요. 악보를 보지 않고 외우니까요. 하지만 연주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악보가 필수였습니다. 휴대용 거문고 악보를 보면 거문고를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문고 그림을 그려놓고, 이 부분의 명칭이 무엇인지,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적어놓았습니다. 거문고 사용설명서 같은 거죠. 이 휴대용 악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끼리 모여 사랑방이나 야외에서 공부도 하고 연주도 하며 풍류를 즐긴 것입니다.”

전시장에 떨어져 있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장기두기’
현재 다시 제대로 걸려 있는 ‘장기두기’
거문고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현재는 음악이 하나 발표되면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전 세계가 모두 같은 음악을 따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음악이 전달되다 보니 마을마다 연주되는 음악이 조금씩 달랐다. 멜로디나 곡의 길이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다양한 영산회상들이 만들어졌다. 더불어 애호가들이 개인적으로 악보를 필사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연주를 하면서 새로운 문화인 풍류방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 잘한다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실력을 인정받고 싶듯이 당시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풍류방에 모여 같이 연주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연주하는지 구경하고, 다른 지역에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풍류방에 초대하기도 한 것이죠. 똑같은 영산회상이라도 지역별로 달랐고, 멜로디가 더 좋은 영산회상은 그 동네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습니다. 애호가들은 풍류방마다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영산회상을 듣고, 연주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필사해서 악보로 남겼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달된 영산회상,
우리음악의 집층성을 담다

 

현재 전라도 구례에는 경기도 지역과는 다른 영산회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많은 악보가 남겨진 것에 비해 현재 연주되는 영산회상은 안타깝게도 소수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전형을 정해놓고 이것만이 최고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영산회상은 고정화된 2~3개 정도만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정책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단절된 것이죠. 또한 조선시대 때 악보라는 것은 최소한의 기록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이 연주를 위해 기억을 살릴 수 있는 정도로만 기록한 거죠. 그리고 우리의 음악은 유동적 선율이 중심이기 때문에 악보에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음악은 선적입니다. 음과 음 사이의 시김새선율을 이루는 골격음의 앞이나 뒤에서 그 음을 꾸며주는 임무를 띤 장식음를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애매한 거죠.”

그렇다면 그가 영산회상이 수록된 휴대용 거문고 악보를 추천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편엽서, 경성일지출상행에서 발행한 조선풍속 시리즈 중 俗39번째 엽서.
제목은 ‘음악으로 앞면에는 악인이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악보라고 하면 ‘정해진 무엇’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19세기에 만들어졌으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악보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그러나 당시 정식출판된 목판본은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만든 정말 희소한 악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보를 박물관에서 보게 되죠. 하지만 휴대용 거문고 악보는 개인이 연주를 위해 그린 필사본입니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이 사람과 사람을 통해 계속 전달이 되면서 전해져 내려온 거죠. 이렇게 전달된 음악은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기 때문에 출판된 악보와는 다릅니다. 우리음악의 특징인 ‘집층성’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부르기 위해 악보나 가사집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하지만 15~20년 전만해도 모임이나 여행을 갈 때 두꺼운 가사집은 필수였다. 그리고 더 먼 과거에는 거문고 연주를 위해 직접 필사한 휴대용 거문고 악보를 옷소매 속에 넣고 다니던 이들이 있었다.

앞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은 전시실 ‘풍류’ 코너에 ‘예전 사람들은 뭘 하고 놀았을까?’라는 주제로 악보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영산회상이 수록된 휴대용 거문고 악보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재미와 재치를 직접 확인해볼 날을 기대해 보자.

인터뷰_ 위철 |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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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박일우 댓글:

    과거 아마추어 풍류음악인이 음악을 배우는 과정을 담은 자세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제각기 층에 따라 기보된 음악(구음 등)들이 남겨져 전해진다는 점에서 국악계에서는 음악배우기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 휴대용 악보를 전시하신다니 기대가 큽니다.

    무엇보다 알려지지 않았던(아니면 몰랐거나) 거문고 음악배우기와 전승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어 기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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